연재 중 미묘케 23화

비치는 이불의 시간.

계절과 사랑이 꿰매어 놓은 투명한 이불

by 적적

2024년 9월 2일이 또렷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그날 브런치 승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작은 통과의례처럼 다가온 알림 하나가 새 도시의 하늘보다 더 선명하게 가슴에 남았다. 낯선 바람, 낯선 사람들, 낯선 계절 속에서 1년을 계약하듯 머물렀고, 이제 다시 또 다른 1년을 앞두고 있다.



돌이켜보면 세 번쯤 발행일을 놓쳤던 것 같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열일곱 번의 프롤로그를 쏟아냈고, 단 한 번은 에필로그를 남겼다. 산만하고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면서도, 이곳에서는 매일 같은 시간에 글을 올리는 이질적인 성실함을 배웠다. 다른 누구처럼 보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문장 하나에 숨을 불어넣는 일이 몸 안에 깊이 스며든 것뿐이었다.



어쩌면 성실하다는 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사랑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억지로 이어 붙이는 근면함이 아니라, 사랑이 흘러나와 남겨진 흔적이 곧 성실이 된다. 그렇게 매일의 기록은 작은 의식처럼 쌓여, 계절을 넘어가는 달력 위에 바늘처럼 꽂혀 있다.



일 년쯤 한 곳에 머물다 보니, 시간은 잠시 멈춘 듯하면서도 어김없이 흘렀다. 그 흐름 속에서 글은 바람을 닮았고, 성실은 습관을 넘어 사랑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하루의 끝자락에 남겨지는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옷감처럼 겹겹이 접히고, 얇아진 빛이 그 틈새를 따라 천천히 스며든다. 지금의 계절은 아직 여름의 숨결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채, 가을의 차가운 예고편을 은밀하게 편집하고 있다. 기온의 미묘한 흔들림,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공기의 투명함, 갑작스레 잦아드는 매미의 울음, 그리고 자주색으로 변해가는 저녁의 그림자. 이 모든 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퀼트 조각 같아서, 한 장 한 장이 따로인 듯 이어져 가을의 얇은 이불을 준비하고 있다.


그 퀼트의 원단은 불균질 하다. 여름의 끝에서 잘려 나온 더위의 파편이 아직 곳곳에 남아 있고, 계절의 이행기마다 늘 따라붙는 불안한 무늬가 천 곳곳에 흩어져 있다. 어떤 날은 아직 습기가 무겁게 눌어붙은 듯 꿉꿉하고, 또 어떤 날은 이불 위로 갑자기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의 패치가 놓인다. 퀼트는 늘 이런 식이다. 직선으로 꿰매어지지 않고, 일정한 문양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틀어지고 엇갈리며, 우연한 배열로만 완성된다. 계절이 만들어내는 이불은 결코 장인의 작품처럼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서 오히려 더 섬세한 감각이 깃든다.



며칠 동안의 날씨는 ‘환절기’라는 명목으로만 설명되기엔 지나치게 다층적이다. 이 과도기는 단순한 전환의 통로가 아니라, 고유한 결의 시간대다. 여름의 마지막과 가을의 시작이 서로를 흡수하지 못하고 부딪히며, 잠깐의 균열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생애에서 ‘청춘’과 ‘성숙’이 그렇게 맞부딪히듯, 어느 한쪽으로 매끄럽게 흘러가지 못하는 틈새의 진동이 있다. 그 진동은 불편하면서도 이상하게 매혹적이다. 사람들은 흔히 완성된 계절을 말하지만, 사실 가장 강렬한 인상은 늘 이 중간의 날들 속에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계절의 몽타주다. 퀼트가 조각난 천을 바느질로 꿰매어가듯, 날씨와 공기와 빛이 제각기 다른 파편들을 이어 붙이고 있다. 이 몽타주는 연속적인 서사보다 단편의 병치로 이루어진다. 이른 아침에만 나타나는 싸늘한 공기, 정오에 다시 고개를 드는 무더위, 오후의 그늘에 스며드는 선선함, 그리고 저녁이 내리는 순간 공기에 붙는 습기의 잔향. 하루 안에서 네 개의 계절이 압축되며, 시간은 마치 재봉틀 바늘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



퀼트를 만드는 일은 느리고 반복적이다. 한 땀, 또 한 땀, 눈에 띄지 않을 만큼의 미세한 진행만이 존재한다. 계절의 이행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도 그 순간을 정확히 가리킬 수 없다. “오늘이 여름의 마지막 날이고, 내일이 가을의 첫날이다”라고 단정할 수 있는 이는 없다. 대신 시간이 만들어내는 작은 구멍들 속에, 이전 계절의 잔재와 새로운 계절의 예감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 애매하고 모호한 시간대야말로 인간이 가장 자주 놓치는 순간이다. 하지만 놓치고 나서야 그 빈틈이 얼마나 귀하였는지 알게 된다.


가을의 얇은 퀼트이불은 보호의 장치라기보다, 기억의 저장고에 가깝다. 여름이 흘려보낸 체온, 한낮에 마주쳤던 무더위의 곡선, 저녁 창가에 맺히던 습기의 방울 같은 것들이, 이불의 안쪽에 얇게 수놓아진다. 이불은 몸을 덮는 동시에 시간을 덮는다. 덮고 나서야 비로소 잊을 수 있고, 잊음으로써만 다음 계절을 맞이할 수 있다.



퀼트가 언제 완성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계절의 바느질은 인간의 손길이 아니라, 더 크고 무심한 손길에 달려 있다. 며칠간의 미묘한 날씨는 그 손길의 작은 움직임일 뿐이다. 마치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바늘을 움직이고 있는데, 그 손의 주인을 확인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간은 그저 이불 아래에 누워, 그것이 어느 순간 자신을 감쌀 때를 기다릴 뿐이다.



때로는 이 기다림이 사랑을 닮았다. 사랑 역시 분명한 시작을 가리키기 힘들다. 어느 날 문득, 이미 그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만 깨닫게 된다. 미세한 말투의 변화, 사소한 시선의 머묾, 이유 없는 불안과 기대의 교차. 그것들은 퀼트의 조각처럼, 흩어진 파편일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그것들을 꿰매어, 하나의 감정으로 완성한다. 이불을 덮는 순간 따뜻함을 자각하듯, 사랑 또한 이미 몸 위에 놓였을 때만 인식된다.



가을은 늘 퀼트처럼 얇다. 겨울의 두꺼운 담요와는 달리, 이 계절의 이불은 몸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는다. 여전히 바람이 스며들고, 차가움이 살갗에 닿는다. 그러나 바로 그 얇음 덕에 사람들은 더 민감해진다. 작은 바람에도 몸은 반응하고, 사소한 냄새에도 기억이 흔들린다. 얇음은 불안함이면서 동시에 예민함이고, 그 예민함 속에서 삶은 더욱 섬세하게 드러난다.



지금의 며칠은 그러한 얇음의 전조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이불은 아직 불완전하고, 완성되기까지는 많은 조각이 남아 있다. 하지만 불완전함 속에서만 감각이 날카로워지고, 감각이 날카로울 때만 존재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계절은 결국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기 위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라도 민감하게 깨우기 위해 머무른다.



어쩌면 이 며칠간의 날씨는 거대한 인생의 은유일지도 모른다. 삶 역시 완성된 계절처럼 선명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무수한 파편들이 겹겹이 꿰매어지며, 어느 순간 얇은 이불처럼 몸 위에 얹힌다. 그것이 따뜻한 위로일 수도, 차가운 현실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떻게 꿰매어졌는지보다, 그것이 결국 덮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덮이고 나서야, 인간은 자기 삶의 무늬를 비로소 읽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 지나고 있는 이 며칠은 단순한 날씨의 흔들림이 아니다. 그것은 바느질이 끝나기 전의 긴장, 조각난 천을 이어 붙이는 과정의 소리 없는 분투다. 언젠가 가을의 밤에 몸을 덮게 될 얇은 퀼트이불은, 바로 이 며칠의 편린들로 이루어진다. 그것을 덮는 순간, 사람들은 아마도 알게 될 것이다. 그저 흘려보낸 줄 알았던 하루하루가 사실은 정교한 바느질의 일부였음을.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삶은 완성된 무늬가 아니라, 끊임없는 꿰매기의 과정이라는 것을. 이불은 언제나 얇고 불완전하지만, 그 얇음 속에서만 인간은 제 감각과 시간을 가장 선명하게 느낀다는 것을.



이불은 언제나 얇고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 얇음이야말로 가장 깊은 촉각을 일깨운다. 어둠 속에서 손끝으로 천의 결을 더듬듯, 계절의 이불 또한 살갗 위에서만 이해된다. 바람은 쉽게 스며들고, 차가움은 미세한 떨림으로 몸을 흔들지만, 그 떨림이야말로 생의 가장 고요한 증거다. 얇음은 결핍이 아니라 투명성이다. 바람이 스며드는 만큼, 기억도 스며들고, 잊었던 장면들이 불쑥 되살아난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얇은 커튼의 그림자, 한밤에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던 낯선 체온, 다 지워진 줄 알았던 웃음소리의 울림 같은 것들이, 이불의 결 사이사이에 붙는다.



그리하여 얇은 이불은 잠을 덮는 것이 아니라 꿈을 덮는다. 잠이 깊어질수록 그 위에 깔린 시간들은 풀리지 않고, 오히려 더욱 정교하게 짜여 간다. 마치 낮 동안 흘려보낸 빛과 그림자가 밤의 직물에 다시 새겨지듯, 이불은 한 사람의 하루를 몽환의 도안으로 바꾸어놓는다. 불완전한 패치워크는 그 자체로 미완의 삶을 닮았다. 어떤 조각은 금세 해어지고, 어떤 조각은 뜻밖의 무늬로 서로를 감싼다. 이불은 늘 얇지만, 얇기에 모든 색채와 그림자가 관통한다.



그리고 언젠가 눈을 감은 순간, 얇은 천은 더 이상 계절의 이불이 아니라 시간의 장막으로 바뀐다. 가을의 차가움이 몸을 감쌀 때, 그것은 단순한 기온의 변화를 넘어 기억의 풍경을 불러낸다. 누군가의 이름이 서늘한 공기 속에서 희미하게 부유하고, 오래전 저녁의 냄새가 이불의 주름 사이로 밀려든다. 꿈과 현실은 더 이상 구분되지 않고, 살갗 위를 지나가는 공기와 마음속을 스쳐가는 그림자가 같은 무늬로 겹쳐진다.


그렇게 얇은 이불은 몸을 덮는 동시에, 삶을 은밀히 가려준다. 덮인 순간 모든 것이 조용히 뒤섞인다. 여름의 열기와 가을의 냉기, 낮의 말들과 밤의 침묵, 지나간 웃음과 다가올 눈물까지. 이불은 그것들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한 겹의 얇은 장막 안에 모두 수용한다. 그래서 그 아래에 누운 존재는 어느 계절에도 속하지 않은 채, 단 하나의 무늬 없는 무늬 속에서 호흡한다.



아마도 지금 지나고 있는 며칠은, 바로 그 무늬 없는 무늬를 준비하는 과정일 것이다. 완성되지 않은 퀼트가 그렇듯, 불완전한 날들의 연속은 하나의 결을 만들고, 그 결 위에 사람들은 눕는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알게 된다. 이불이 얇아 더 많은 바람을 허락했듯, 삶 또한 얇아야만 꿈과 기억을 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얇음은 허약함이 아니라 투명한 감각의 조건이며.



그 투명함 속에서만 존재는 비로소 자신을 몽환처럼 드러낸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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