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미묘케 27화

움직이지 않는

비를 받아들이는 가로수처럼.

by 적적

도시는 비가 내릴 때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바닥에 고인 물은 신호등을 거꾸로 비추고, 건물 벽은 어둡게 번진다. 빗소리는 말보다 빠르게 퍼져나가며 사람들의 걸음을 조정한다. 발걸음은 단축되고, 고개는 숙여지고, 손에는 우산이 쥐어진다. 그러나 인도 가장자리에 서 있는 가로수는 조금도 이동하지 않는다. 땅을 깊이 붙잡은 채, 내리는 빗물을 빨아들이며 묵묵히 서 있다.



가로수는 늘 같은 자리에 있다.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에 잎을 넓히고 가을에 낙엽을 떨군다. 겨울에는 가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빗속의 가로수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물은 도로의 표면을 흘러내리고, 배수구로 흘러 들어가며, 때로는 넘쳐흐른다. 그 과정에서 흙과 뿌리가 빗물을 붙잡는다. 아스팔트 위에서는 소음을 만들던 빗방울이 흙 위에서는 사라진다. 나무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빗물은 곧 양분이 되고, 뿌리는 더 깊이 파고든다.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가로수는 일종의 은유다.


불확실한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는 태도, 혹은 아무 대가 없이 받아들이는 자세. 많은 사람들은 빗속에서 몸을 웅크린다. 그러나 나무는 피하지 않는다. 나무는 맞이한다. 그것은 의지라기보다 존재의 조건이다. 움직일 수 없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무력함 속에서 오히려 단단함이 생겨난다.



사람은 상황을 통제하려 한다. 젖지 않으려 하고, 흐르지 않으려 하고, 넘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나무는 다르다. 나무는 흐름을 끊지 않는다. 물이 지나가면 땅속으로 흘려보내고, 필요한 만큼만 흡수한다. 그것은 절제라기보다 균형에 가깝다. 지나치게 빨아들이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다. 흙은 물을 담고 비워내며, 나무는 그 위에서 생존을 이어간다.



가로수는 도시의 리듬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사람들은 신호등에 따라 멈추고 걷는다. 차들은 정해진 차선 위를 흐른다. 그러나 나무는 그 흐름을 바라보는 듯 서 있다. 마치 인간의 질서를 외면한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질서보다 오래 버티는 것은 나무다. 도로가 다시 깔리고 건물이 철거되고 세워질 때도, 나무는 같은 자리에서 뿌리를 내린다. 비가 내릴 때마다 그 사실은 드러난다. 인간의 규칙은 빗방울 하나에도 쉽게 흩어지지만, 나무의 존재는 한결같다.


빗속의 가로수를 바라보면 어떤 질문이 떠오른다. 무엇을 피하지 않고 맞이할 수 있는가. 무엇을 거부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는가. 사람들은 늘 선택을 강조한다. 원하는 것을 취하고 원치 않는 것을 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로수는 선택하지 않는다. 가로수는 조건을 받아들인다. 더운 햇살도, 차가운 바람도, 내리는 비도. 그 수용의 태도가 나무를 성장하게 만든다. 선택의 자유보다 조건의 수용이 때로는 더 강력하다.



비는 불편함을 만든다. 도로를 미끄럽게 하고, 옷을 젖게 하고, 걸음을 방해한다. 그러나 불편함을 피하려는 몸짓 속에서 삶의 본질이 드러난다. 피하려는 순간, 불편함은 더 크게 느껴진다. 받아들이는 순간, 불편함은 사라진다. 가로수는 그것을 보여준다. 비를 맞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그 빗물로 살아간다. 불편은 성장의 조건이 된다.



비가 내리는 순간은 항상 일시적이다. 곧 그치고, 다시 마른땅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 사이에 흡수된 물은 오래 남는다. 나무는 그 물로 계절을 준비한다. 봄을 위한 에너지를 비 속에서 저장하고, 여름을 위한 잎맥을 키운다. 순간적인 불편함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축적된 힘이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과 닮아 있다. 고통은 사라지지만 흔적은 남고, 그 흔적은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가로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빗물이 떨어지는 순간마다 뿌리로 향하는 보이지 않는 통로가 열린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작동한다. 사람의 삶에서도 보이지 않는 흡수와 축적이 일어난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 논리로 정리되지 않는 경험, 이름 붙이지 못한 기억들. 그것들이 스며들어 내면을 지탱한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보여도, 내면은 빗물을 빨아들이는 흙처럼 변한다.



도시의 가로수는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방식에 대한 가르침이다. 무엇을 견디고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 무엇을 피하지 않고 맞이할 것인가. 빗속에 서 있는 나무는 그 답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땅을 붙잡은 채 비를 흡수하는 그 모습으로.


가로수는 내리는 빗물을 받아들이며, 동시에 그 물을 잃어버린다. 붙잡는 순간 흘려보내고, 흘려보내는 순간 간직한다. 인간의 삶도 이 이중적 움직임을 벗어날 수 없다. 사랑을 붙잡으려 할 때 이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떠나보냈다고 믿는 순간에도 기억 속에서 더 강렬히 자라난다. 그러므로 붙잡음과 놓아줌은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완성한다. 나무의 뿌리가 흙을 움켜쥐고 있으면서 동시에 흙을 통과해 스며드는 물을 허용하듯이.



비는 늘 지나간다. 그러나 지나간 뒤에도, 그 부재가 만들어낸 흔적은 남는다. 물방울이 흘러간 자리에 남겨진 진흙, 젖은 흙냄새, 그리고 그 흙을 통과해 흡수된 수분. 존재는 언제나 그 흔적 위에서 자란다. 인간의 기억 또한 같다. 사건은 지나가고, 그 사건의 생생한 감각도 점차 사라지지만, 그 흔적은 내면에 뿌리처럼 남아 삶의 무게를 재구성한다. 빗물은 사라지지만, 뿌리는 더 단단해진다.



삶은 피하려는 몸짓과 받아들이는 몸짓 사이에서 갈라진다. 어떤 이는 젖지 않으려 하다가 끝내 더 젖고, 어떤 이는 젖음을 받아들이다가 오히려 더 자유로워진다. 두 태도 중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두 태도의 결과는 다르다. 젖지 않으려는 자에게 비는 적대적 사건으로 남고, 젖음을 받아들인 자에게 비는 하나의 계절로 흘러간다. 결국 비는 누구에게도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의 태도는 삶의 결을 바꾼다.



도시의 한복판에서 빗속에 서 있는 가로수를 떠올려보라. 그 나무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다. 단지 거기 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침묵이 오히려 가장 오래된 진실을 속삭인다. 받아들이는 것, 피하지 않는 것, 사라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존재의 방식이다. 사람은 종종 의미를 묻고, 진실을 갈망한다. 그러나 나무는 대답하지 않는다. 오직 살아 있음으로만 대답한다.



가로수가 내리는 빗물을 빨아들이는 순간, 그 행위에는 거짓이 없다. 숨기지도 않고 과장하지도 않는다. 단지 받아들인다. 삶 또한 그와 같다. 누구도 스스로의 시간을 완전히 소유할 수는 없다. 다만 주어진 순간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뿐이다. 받아들임 속에서만 시간이 자기 것으로 변한다. 빗물이 땅으로 스며들어 나무의 일부가 되듯이.



결국 모든 존재는 가로수와 다르지 않다. 움직이지 못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없음을 받아들였기에 거기에 뿌리내린다. 피할 수 없는 것 속에서 자기 몫을 얻는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지혜이자,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통찰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모든 것은 흘러가지만, 존재는 그 흐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한 자리에 서 있다. 비가 내릴 때마다, 그 진실은 다시 증명된다.



결국 모든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빗물을 맞이한다. 사람은 우산을 쓰고, 건물은 물길을 만들고, 도로는 배수구를 통해 내보낸다. 그러나 가장 오래 남는 것은 가로수의 방식이다. 내리는 빗물을 빨아들이며 살아가는 일. 그것이야말로 도시에 남겨진 가장 오래된.




철학자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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