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엔 수거되지 않을 것이다.
도시의 뒷골목은 낮에도 밤처럼 어둡다. 건물 벽은 햇빛을 반사하지만, 그것은 결코 바닥까지 내려오지 못한다. 벽과 벽 사이에 끼인 골목에는 늘 오래된 냄새가 고여 있다. 녹슨 배관에서 스며 나온 쇠맛, 눅눅하게 젖은 비닐 냄새, 음식 찌꺼기의 단내, 그 위에 오래 쌓인 먼지의 미세한 입자들. 그 모든 것이 섞여 만든 불쾌한 공기가,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옷에 스며든다. 그 공기 속에서, 검은 봉투 하나가 무심히 놓여 있다.
봉투는 흔히 본 것과 다르지 않다. 반투명한 비닐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듯, 안에 담긴 어둠을 가늠케 한다. 그런데 그 어둠 속에서 낯선 윤곽이 드러난다. 봉투는 팽팽하지 않고, 이상하게 한쪽으로 쳐져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검은 고양이가 웅크린 채 누워 있다. 이미 닫힌 눈, 젖은 털, 무게를 잃어버린 사지. 그런데 그 목에는 작은 목걸이가 걸려 있다. 봉투의 반투명한 막을 뚫고, 금속 장식이 희미한 빛을 내뿜는다.
죽은 고양이와 목걸이. 이 두 사물의 결합은 기묘하다. 장식품은 살아 있는 몸을 꾸미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 목걸이는 움직임 없는 몸에 매달려 있다. 빛을 내지만, 그 빛은 생명을 되돌리지 못한다. 오히려 생명의 부재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살아 있는 동안 이 고양이는 단순한 길짐승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름이 있었을지 모른다. 불러줄 목소리가 있었고, 목걸이를 채워줄 손길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목걸이는 사랑받던 존재의 증거가 아니라, 버려진 존재의 부속품으로 남아 있다.
쓰레기봉투는 도시가 개발한 가장 효과적인 망각의 장치다. 무언가를 그 안에 넣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지나간 것’으로 분류된다. 봉투는 폐기를 기다리는 사물들을 수집하고, 곧 사라질 운명을 은폐한다. 길거리에 놓인 순간, 그것은 도시의 망각 체계 속에 편입된다. 사람들은 봉투를 열어보지 않는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단지 묶어 버리고, 수거하고, 치운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잊힌다.
목걸이를 한 고양이는 봉투의 기능을 파괴한다. 봉투는 더 이상 단순한 폐기의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증언의 장소가 된다. 반짝이는 금속은 봉투의 어둠을 뚫고 나온다. 봉투는 은폐하려 하지만, 목걸이는 드러내려 한다. 사라짐을 전제로 한 장소가 돌연 기억의 무대가 된다.
죽은 고양이는 단순한 동물의 사체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관계가 끝났음을 알린다. 목걸이는 관계의 흔적이다. ‘누군가가 이 고양이를 기억했다’라는 증거다. 그런데 그 증거마저 버려졌다. 목걸이를 한 채 봉투에 담긴 시체는, 기억이 폐기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관계의 파편은 사물처럼 버려질 수 있다.
애써 이름을 붙이고, 목걸이를 채우던 순간은 어디로 갔는가. 사랑은 그토록 쉽게 망각될 수 있는가. 한때의 애착은 결국 쓰레기와 함께 봉투에 묶인다. 목걸이는 오히려 반짝인다
검은 고양이는 오래된 상징이다. 불길함, 고독, 마녀의 동반자, 혹은 신비의 표상. 그러나 봉투 속의 고양이는 더 이상 상징이 아니다. 너무나 구체적이고, 지나치게 물리적이다. 축축한 털, 늘어진 몸, 비닐에 눌린 얼굴. 그 구체성은 상징을 무력화한다. 신화는 죽음의 실재 앞에서 무너진다. 검은 고양이가 지녔던 모든 상징적 의미는 봉투에 함께 묶여버린다. 동시에, 상징의 무력화는 새로운 상징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도시의 잔혹한 무심함, 기억의 부패, 애정의 폐기라는 상징이다. 고양이는 이제 더 이상 신비의 동물이 아니다. 대신 도시의 잔혹한 거울이 된다.
도시는 죽음을 감추는 기술에 능숙하다. 사람의 죽음조차 병원과 장례식장으로 이동하며, 거리는 늘 깔끔하게 유지된다. 죽음은 일상에서 밀려난다. 그러나 봉투 속의 고양이는 도시의 은폐 장치를 뚫고 나온 균열이다. 거리 한가운데에서, 죽음은 가장 노골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고양이의 시체는 도시의 심장을 향한 은밀한 질문이다. 살아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억은 어디까지 보존될 수 있는가. 사랑은 왜 이렇게 쉽게 버려지는가. 봉투 속에서 썩어가는 것은 단지 몸이 아니라, 의미 자체다. 의미의 부패는 가장 끈질긴 냄새를 남긴다. 그 냄새는 골목에 맴돌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의식에 스며든다.
목걸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기념의 행위다. 인류의 역사는 죽은 자를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의 역사이기도 했다. 고대의 무덤은 장신구와 함께 지어졌다. 왕의 시신 곁에는 금과 보석이 놓였다. 그것은 죽음을 넘어 기억을 지속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이 고양이의 목걸이는 그 모든 기념의 전통과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 있다. 기념은 사라졌고, 목걸이는 버려졌다. 한때의 사랑과 기억은 봉투 속에서 함께 썩어간다. 고대의 무덤이 기억을 지키기 위한 돌의 집이었다면, 이 봉투는 기억을 버리기 위한 비닐의 집이다.
도시는 매일 수많은 봉투를 삼킨다. 그 안에는 눈에 띄지 않는 무수한 죽음들이 있다. 동물의 죽음, 관계의 죽음, 꿈의 죽음. 목걸이를 한 검은 고양이는 단지 하나의 사례다. 그러나 그 장면은 도시 전체를 은밀하게 비춘다.
목걸이는 끝내 증언한다. “한때 사랑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선언한다. “지금은 아무 의미 없다.” 목걸이는 두 개의 진실을 동시에 드러낸다. 사랑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기억은 존재했지만, 이제는 폐기되었다.
작은 봉투 안에는 도시 전체가 들어 있다. 봉투는 폐기의 상징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의 세계가 압축되어 있다. 고양이와 목걸이, 음식물 찌꺼기, 비닐 조각, 신문지. 그것은 도시의 삶이 축소된 풍경이다. 봉투 안을 들여다보는 일은, 도시의 내장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고양이는 그 내장 속에서 기묘한 별처럼 빛난다. 목걸이가 발하는 미약한 빛은, 봉투라는 소우주 속에서 유일한 광원이다. 그 빛은 봉투의 어둠을 찢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구원하지 못한다. 그것은 희망의 빛이 아니라, 절망의 빛이다.
고양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죽음은 살아 있는 이들을 흔든다. 쓰레기봉투 속의 고양이는 단순한 사체가 아니라, 존재의 가장 은밀한 비극을 드러내는 검은 구멍이다. 목걸이는 그 균열 위에 매달린 작은 별처럼 반짝인다.
그 별빛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소각장에서 연기로 흩어지고, 목걸이는 재 속에 묻히거나 파편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장면을 목격한 순간만큼은, 목걸이의 빛은 잊히지 않는다.
도시는 매일 봉투를 삼키며, 무수한 죽음을 은폐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봉투 속에서 뜻밖의 빛이 반짝인다. 그것은 도시의 심장에 난 균열을 비추는 빛이다. 살아 있음은 끝내 봉투 속으로 사라지는 일일지라도, 그 잠깐의 빛은 사람들의 의식을 흔든다.
온종일 떠나지 않을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