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의 동영상

기억이 나를 살짝 들어 올려

by 적적

그날은 광고주를 만나러 사무실에 들르지 않고 강남으로 가야 하는 날이었었죠.

목련도 지고 벚꽃도 지고 늦봄이었죠 조금씩 더워지던 지금 생각해 보니 여름에 더 가깝던.

모든 교통수단이 그런 것처럼 땀을 닦아내며 버스정류장에서 가까워졌다 멀어지며 기다리기를 포기할 즈음 버스가 도착했어요. 오랜만에 타보는 버스라 번호와 목적지를 확인했죠.


버스에 오르자 갑자기 에어컨의 찬바람에 안경이 뿌옇게 되며 짐짝처럼 안으로 밀려들어가고 있었는데 다행히 창가 쪽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사실 지금까지 말한 기억은 추측에 불과한 것이었죠

대부분의 기억은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찍어 놓은 사진 같아서 색이 번져 있거나 간혹 지문이 날인되어 있는데 지금 기억은 하나의 동영상 같은 기억인 것 같아요.


한 여자가 팔 차선 건널목 반대편에 서서 손을 번쩍 들고 서 있었어요. 어쩌면 그 여자는 나만 보았을지도 몰라요. 반대편 건널목엔 빨간불이 깜박거리는데 말이죠. 파란불이 들어오자 그녀가 대각선으로 뛰기 시작했어요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스커트를 입고 게다가 킬힐을 신고 말이죠. 어느 순간 그녀가 뛰어오는 걸 버스 안의 모든 사람이 보았고 그녀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고 절대로 버스가 떠나지 않을 거라 믿으며 뛰었어요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높은 구두를 신고 무릎양쪽을 묶어 놓은 듯한 치마를 입고 뛰는 사람을 본 건 처음이었어요

마치 100m 달리기를 하는 육상 선수 같았죠. 그렇게 차는 정차해 있었어요 출근 시간이라 버스 안의 사람들은 술렁거렸죠. 왜 출발을 안 하는지 기사에게 소릴 질렀어요

분명 그녀를 보지 못한 사람이거나 차가 멈추자 잠에서 깬 사람이었을 게 분명해 보였죠.


대각선으로 달려오던 그녀가 버스에 다다라 속도를 줄이자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가 버스에 오르는 걸 모두 쳐다보았어요. 뛰어올 땐 그토록 작아 보이던 그녀는 버스에 오르자 제법 큰 키에 긴 머리를 넘기며 기사 아저씨에게 큰소리로 고맙습니다라고 외쳤어요 갑자기 혼자 박수를 칠 뻔했어요.


푸른 신호는 아직 기다려야 하고 내가 타야 할 버스는 버스정류장에 있고 신어본 적도 이번 생엔 신을 수도 없는 킬힐을 신고 있다면 돌아볼지도 모를 기사 아저씨에게 손을 흔들고 대각선으로 버스를 향해 뛸 수 있었을까 기다리다 그냥 떠나 버릴 거란 생각을 뛰면서 못했을까?


봄도 지나고 가을아침에 너무 빠르게 머릿속에 연기를 피우며 동영상 한편이 빛을 뿜고 사라졌어요

그녀가 떠오른 건 그녀가 너무 예뻤기 때문일까 모든 생각을 접고 온전히 그 순간 뛰었던 모습 때문이었을까 버스에 오르며 숨을 고르고 들고 있던 여름 재킷을 고쳐 팔에 걸치던 간절함의 여유 때문이었을까


날이 흐립니다. 세상은 스노우볼 속처럼 고요해요 길 건너 24시간 카페 앞을 할 일 없이 서성거리며 카페 안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립니다.

음악은 전주를 지나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소용돌이를 앞에 둔 작은 나뭇잎처럼 급류를 타기 위해 건널목 앞을 대기 중입니다


소용돌이를 건널 땐 빠져들어 가는 어느 시점 발끝을 살짝 들어오려 미끄러지듯 건너편 급류를 물수제비처럼 타 넘겨야 해요 그 작은 시점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집중해야 하죠


나는 물 수제비를 오랫동안 타본

건너편 강가에서 수없이 던져져 이편에 다다를 수 있는

마찰력에도 최적화된

손에 쥐기 좋고 물의 장력을 잘 피해 가도록

얇고 가는 정신을 지녔어요

지치더라도 가벼운 맘으로 물살을 따라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늘이라는 작은 시냇가를 튕겨내듯이 건너봅시다.


나를 좋아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그대라도


그래도 저녁에 봅시다


행복한 하루가 아니었더라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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