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면도칼, 그리고 장미

그중 어느 하나,

by 적적

오른손 집게손가락 첫 번째 마디가 쓰라립니다. 무언가 잡거나 물이 묻으면 혹은 바람이 제법 부는 큰 길가로 손끝이 드러나면 쓰라리고 아픕니다. 그 증상은 가을이 시작된 날부터이니 며칠 되지 않은 최근의 일입니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들여다보며 몸에 일어난 통증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였을 법한데


왜 아프지?


라며 이틀쯤 지난 것 같습니다. 기어코 오늘 화장실을 가서 손을 씻습니다. 모란은 무릎에 앉고 난 후에야 집게손가락을 들여다봅니다. 벌어진 살갗이 보입니다. 나라는 사람에게도 협곡이 생겨나 있고 얕은 상처를 벌려보자 하얗게 아무도 닿은 적 없는 속살이 보입니다.


이제 더 이상 피도 배어 나오지 않는 상처. 너무나 예리하게 베어져 베어진지도 모르는 상처 그리고 지혈하지 않아도 되는 상처.


혹시 가장 오래된 기억을 묻는다면 어떤 기억을 말해줄 수 있나요?


길을 귀신처럼 잘 찾는 친구는 어릴 적 처음으로 가본 대도시에서 엄마 손을 놓치고 미아가 되어 지나는 상가 사장님의 손에 잡혀 친구 어머니가 길을 되짚어 오는 동안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공포심에 지상의 모든 길을 외우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저는 그날의 기억이 가장 오래된 기억일지도 모릅니다.


바지를 입히지 않아도 되는 나이였던 것 같아요. 할머니 집에 잠시 맡겨져 온종일 햇살이 사라지지 않는 마당에서 놀았습니다. 할머니는 늘 사내놈들은 바지를 입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얀 런닝 하나와 팬티만 입은 아이는 어른들 사이에서 하루가 너무 길었고 심심했어요.


눈을 비비며 일어난 아침에 햇살은 다시 한번 눈을 비벼야 마당에 나갈 수 있었죠. 수돗가에서 할아버지가 커다란 대야에 물을 한껏 담아 세수를 하고 면도기에 면도칼을 끼워 면도하고 수돗가에 조심스레 두고 잠시 사라졌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사내아이가 면도기 쪽으로 홀리듯 다가갑니다. 그리고 면도기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만져봅니다. 면도기 안쪽에 들어있는 것을 꺼내 보려던 아이가 벌에 쏘인 듯 면도기를 바닥에 떨어뜨립니다. 손끝은 하염없이 햇살 아래 놓여있던 정수리처럼 가렵고 화끈거립니다. 입고 있던 하얀 런닝에 손가락을 닦습니다.


다들 제 할 일로 바쁜 어른들 틈에서 작은 아이가 댓돌 위에 앉아 아른거리는 손가락 끝으로 꽃을 그립니다. 하얀 런닝 위로 손끝에 빼어 나온 피를 묻혀갑니다.


지나던 할머니가 유심히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손바닥으로 꽃을 감춥니다.


담장 아래 있던 이름을 알 수 없는 넝쿨에 피어난 꽃과 런닝에 찍혀있던 핏자국을 번갈아 바라봅니다.

모든 책은 숲에서 왔습니다. 새로 산 책은 책장 안에 순장된 작은 시내와 바위, 그 위에 푸른 이끼, 그리고 수많은 벌레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종이에 베인 상처는 인간에게만 깊게 파고듭니다. 어느 시집에 베인 건지 알 순 없지만, 손가락에 반창고를 붙여둡니다.


이른 아침부터 장미덩굴도 사라진 집을 찾아다녔습니다.


여름을 흐르는 동맥에서 장미가 피어납니다.


지나는 여름은 정맥을 따라 다시 심장에 다다를 때까지


가장 오래된 기억을, 종이에 베인 상처를, 그 꽃이 피는 여름이 오기 전 어느 날을.


그리고 사진첩을 뒤져 기어코 그 담장의 장미꽃을 찾아냅니다.

입고 있던 흰 티를 바라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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