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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종결자 May 03. 2019

카니발을 손꼽아 기다리는 서독 사람들

1년 중 서독 사람들이 제일 부지런하고 활기 있는 때가 언제냐고 묻는 다면 한 치의 고민 없이 카니발 기간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평소야 그저 개미처럼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 맥주 한 잔 마시며 축구 게임을 보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노잼 독일인들인데 카니발 기간만 되면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하는 모양이다. 스몰 토크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독일 동료들이 한 달 내내 회사에서 나를 만날 때마다 “너는 어떤 카니발 의상 만들어?”, “너도 카니발에 쾰른 갈 거야?”라며 묻는 통에 같은 대답을 반복하느라 입이 아플 정도였다. 브라질에서만 유명한 줄 알았던 카니발이 독일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 것을 에센에 살면서부터 실감할 수 있었다. 


카니발처럼 가면을 쓰고, 코스튬을 입는 행위는 중세 로마시대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 로마인들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겨울의 악귀들을 쫓아내며 따뜻한 봄을 맞이하고 그 해 풍년을 기리는 의미로 행하던 의식 같은 것이다. 독일 쾰른과 마인츠에서 열리는 카니발은 이후 중세 로마 제국 시절 이전에 있었던 의식 행사를 종교와 결합하여 탄생시킨 것에서 유래했다. 당시 카니발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부적으로 체계화 되어 있던 계급 제도,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주는 굴레에서 벗어나 파티를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평범한 사람들이 왕이나 성직자, 정치인처럼 높은 신분의 인물들로 변장을 하고, 그들을 풍자하며 자신들의 불만이나 욕망을 표출했다. 


오늘날 카니발은 매년 11월 11일, 11시 11분에 정확히 시작되어 렌트(Lent) 또는 파스트(Fast)라고 불리는 사순절 전 화요일에 끝이 난다. 시작하는 날짜가 어쩌다가 11이 반복되는 날, 시각이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어쩐지 잘 풀리지 않는다. 한동안 11월 11일이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날이라서 그런 것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11이 바보 같은 숫자 혹은 허수로 간주되어 5번째 상상의 계절로 불리는 카니발과 의미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또 1+1이 평등을 상징하여 성별이나 나이, 계급과 상관없이 모두가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카니발의 사회적 의미를 대표한다고 이야기 한다. 


카니발은 종교적 의미가 짙은 행사지만 독일 사람들에게 그런 기원이나 상징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종교가 없는 독일인도 훨씬 많고, 카톨릭이 아닌 사람도 많지만 개의치 않고 모두가 함께 즐기는 축제로 맞이한다. 카니발이 어떻게 시작된 건지 설명하지 못하는 젊은이들도 무척 많을 테다. 젊은 사람들에게 카니발이 어떤 의미가 있는 지 물으면 사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맥주를 엄청나게 마시기 위한 또 하나의 구실이지 뭐!” 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 카니발 행사가 열리는 주의 주말부터 당일까지 번화가뿐 아니라 동네 작은 술집도 모두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광적으로 맥주를 마신다. 옥토버페스트가 텐트 밖으로 나왔다고 하면 적당한 표현일 것 같다. 이 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이미 술에 만취되어 있는 독일 사람들에 놀랄 수 있다. 길을 걷다 잠깐만 고개를 돌리면 길거리에서 노상방뇨를 하는 남자들은 물론 큰 소리를 노래를 부르고 프로스트를 외치는 중년들도 많다. 코스튬도 입지 않고 술 한잔 마시지 않은 내가 오히려 너무나 부끄러운 꼴이 되어 버린다. 나 혼자서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만 같아서 미친 척 하고 하회탈이라도 하나 써주어야 마음이 편해진다.  

특히 쾰른 사람들에게 카니발은 단순한 거리 축제가 아니라, 쾰르너로서 열심히 준비해야 하고 또 열심히 즐겨야 하는 전통이자 문화이자 삶의 일부이다. 카니발 시즌이 쾰른에서 ‘5번째 계절’로 불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카니발이 시작되는 11월부터 끝나는 2월까지 다양한 카니발 행사와 퍼레이드가 열리고 이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우리에게 가장 알려진 최대의 퍼레이드는 카니발이 끝나는 주의 일요일이나 로젠몬탁(Rosenmontag)이라 불리는 월요일에 열린다. 쾰른에서 열리는 퍼레이드가 독일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이 날은 국가가 지정한 공휴일은 아니지만 해당 주에 있는 대부분의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임시 휴일을 지정하여 직원들이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허락한다. 사실, 휴일을 주지 않는다면 아마 절반 이상의 직원이 모두 휴가를 쓰거나 회사에 나와서 일은 안하고 카니발 이야기만 할 테니 쿨하게 휴일을 주는 것이 낫다. 


11월 11일에는 카니발 개막 행사가 열린다. 쾰른 카니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쿌너 드라이게스티른(Koelner Dreigestirn)이라 불리는 세 명의 상징적 인물 – 카니발 왕자, 일꾼 그리고 처녀로 분장한 남성 대표들의 행진이다. 남자가 처녀로 분장을 한다니 왠지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대표로 뽑힌 남자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얼굴과 다리 털을 완전히 밀고 곱게 화장을 하여 본연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조금 우습게 들리지만 이 세 명의 대표자로 선정되는 것이 워낙 명예로운 일이라 신청자도, 또 임명도 매우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5년이 넘는 시간을 대기자 명단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할 정도다. 이 날에는 예켄(Jecken)이라고 불리는 바보 가면을 쓴 사람들이 커다란 머스타트 냄비에서 나와 공연을 펼친다. 그 모습이 하회탈을 쓰고 정치인을 풍자했던 하회별신굿 탈놀이와 아주 닮았다. 국가를 불문하고 옛날에는 자신을 숨기고 지배자들을 비판하는 의식이 있었나 보다. 어떤 시장들은 종종 본인이 근무하는 시청 발코니에 나와 풍자극에 화답하기도 한다고 한다. 


여성들을 위한 카니발 행사도 있다. 라인란드(Rheinland)지역에서 카니발이 끝나는 전 마지막 목요일에 열리는 바이버파스트나흐트(Weiberfastnacht)가 바로 그 것이다. 라인란드에서 시작되었지만 바이에른 등의 타 지역에서도 여성들만을 위한 카니발 행사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이 날은 각기각색의 마녀 분장을 한 여자들이 모두 도시에 나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표현한다. 중세 시대에도 상류층 부인들이 가족이나 사회의 눈치보지 않고 버린 채 술을 마시고 즐기도록 허락되던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세기 보이엘(Beuel)이라는 서독의 한 작은 마을에 살던 세탁부 여성들이 오늘날의 바이버파스트나흐트를 다시 탄생시켰다. 이들은 당시 하루 16시간을 일하면서 고위층 남자들의 옷을 세탁하는 것도 모자라 집에 돌아와서는 카니발에 간다고 잔뜩 들떠있는 남편들과 옷까지 모두 깨끗이 세탁한 뒤 정작 자신들은 남편이 놀고 있는 동안 집에서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느라 하루 종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이런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같은 일을 하는 세탁부 여자들이 한 술 집에 모여 남편들을 흉보고 술을 마시며 나름의 파티를 연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그들은 곧, 보이엘 여성 위원회를 만들어 시청에 여성들을 위한 자유의 날을 달라고 요구했고, 이것이 라인란드 전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 행사의 가장 큰 재미는 바로 남성의 권위, 여성의 순종적인 역할에 반기를 드는 상징적 행위로 지나가는 남성들의 넥타이를 자르는 것이다. 이 날 행사 장소를 지나는 남성이라면 절대 본인이 아끼는 넥타이나 값 비싼 넥타이를 매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물론, 공짜로 함부로 남의 물건을 훼손할 마녀들이 아니다. 넥타이를 싹둑 자르는 대신 보답으로 가벼운 뽀뽀를 선물한다. 물론 남자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아무리 제멋대로인 행사라도 이런 행위를 할 수는 없지만 다행히 매력적인 마녀들의 뽀뽀를 거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종종 장난이 심해 볼에다 뽀뽀를 하려는 마녀를 속이고 입술에 뽀뽀를 받는 남자들도 있다. 이 날은 넥타이를 자르는 것뿐 아니라 지나가는 남자들을 붙잡고 엉덩이를 만지거나 함께 술을 마시자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참가자들도 있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성희롱이 남녀불문하고 사회적 문제로 많이 부각되는 오늘날에도 이런 전통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 맞는지를 두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어도 보이엘과 쾰른에서 바이버파스트나흐트는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고 여성들의 축제로 남을 것 같다.  


카니발이 퍼레이드에 참여하기 위해 몇 주간 고심하고 의상을 만드는 독일인들을 보면 그 진지함과 열성에 감동까지 받게 된다. 작년에 입었던 것은 안되고, 의미나 메시지가 있어야 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어야 하고 또 가능하면 어쨌든 내 의상이 최고여야 하는 것이다. 아마추어 외국인들이야 코스튬을 만드는 것이 번거롭고 쉽지 않아 코스튬 가게나 온라인 샵에서 완제품을 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의상과 소품을 모두 직접 만들거나 기본만 산 뒤 리폼을 한다. 자녀가 있는 경우 자녀의 의상까지 완벽하게 제작해야 하니 10월과 1월 한 달은 의상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2018년 로젠몬탁에 열린 퍼레이드에서 인상에 남는 코스튬 중에는 트럼프와 김정은이 큰 핵무기 버튼을 손에 쥐고 걸어가는 모습, 불이 나고 있는 갤럭시 휴대폰, 캡틴 아메리카로 완벽 분장한 근육질 남자, 남자 성기 모양으로 변신한 여자, 켄타우로스와 똑 같은 모습으로 열심히 앞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 등이 있었다. 온 가족이 딸기로 변신했는데, 그 중 세 살 정도로 보이는 딸아이는 아마도 그 딸기 코스튬이 너무나 싫었는지 행진하는 내내 ‘딸기 싫어!!!’라며 울고 가는 것이 너무나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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