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에피종결자 May 10. 2019

우리 와인도 제법 잘 만든다고!

독일인과 프랑스인이 함께 식사를 하면 빠지지 않는 대화 주제가 바로 와인이다. 독일에 오래 산 프랑스 친구는 어떤 음식을 먹든 맥주와 함께하는 독일인들을 보고 이래서 독일인들은 미식가가 될 수 없다고 소소한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독일인들은, 물론 프랑스 사람들만큼은 아니지만, 와인을 굉장히 즐겨 마신다. 독일이 세계에서 8번째로 큰 와인 생산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주위에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등 와인으로 유명한 나라가 워낙 많다 보니 그저 맥주 왕국으로만 불리는 게 안타까울 정도이다. 독일 슈퍼에 가면 한 병에 2유로 정도 하는 아주 저렴한 와인부터 고급 와인까지 가격부터 종류까지 다양한 와인이 많은데, 심지어 대형마트 알디(Aldi)에서 판매하는 3유로짜리 리즐링도 정말 맛있다. 저렴이 포도 주스 맛 같은 우리나라의 J 브랜드 와인과는 차원이 다르다.  


독일 와인의 자부심은 누가 뭐래도 화이트 와인이다. 독일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65%가 화이트 와인인데, 그 이유는 남유럽 국가보다 일조량이 적고 온도도 낮은 기후 때문이다. 독일의 와이너리는 서쪽과 남쪽에 강을 따라 주로 몰려 있다. 대표적인 13곳의 포도 농장은 라인 강, 모젤 강, 넥카 강, 마인 강 주변인, 남부와 서남부 지역에 몰려 있다. 특히 라인 강을 따라 위치한 비즈바덴, 뤼데스하임, 코블렌츠와 같은 지역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수많은 유적지와 와인 농장이 아름답게 섞여 있어 관광지로 사랑받고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발 밑에 펼쳐지는 와인 농장 풍경을 만끽하다, 멈춰 선 곳에서 중세 시대의 요새를 방문하고 저녁에는 강을 바라보는 레스토랑에서 화이트 와인을 마시는 것이야 말로 이 지역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물론 레드 와인도 여전히 꿋꿋하게 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어쩐지 독일의 레드 와인이라고 하면 독일인들조차도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싸구려 내 입맛에는 독일의 레드 와인도 그저 맛있기만 한데 화이트 와인에 비해 경쟁력이 너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인지, 종종 유머의 소재로 이용된다. 함께 일하던 프랑스 동료가 10년을 살던 독일을 떠나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직장을 그만두던 날, 독일 동료들은 농담 반 진담 반의 작별 선물로 독일의 레드 와인을 선물했다. 카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독일이 그리워질 때마다 이 레드 와인을 한 잔씩 마셔봐- 그러면 네가 프랑스에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다시금 깨닫게 될 테니!’라고. 흥미롭게도 독일에서 화이트 와인이 보다 많이 생산된 이유는 중세에 와인 생산을 관리하던 수도사들의 결정 때문이라고 한다. 에버바흐에 있던 수도사들이 오래 지켜본 결과 라인가우 지역에서 생산되는 적포도로 만든 레드 와인이 프랑스의 짙고 풍미 깊은 레드 와인을 따라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관할 지역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소작인에게 적포도를 줄이고 백포도 생산을 늘리라고 명령했고 이 것이 천천히, 다른 지역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라는 설이다. 

 

화이트 와인 강국 – 리즐링

독일 화이트 와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리즐링이다. 독일에서 생산되는 화이트 와인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또한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품질을 인정받는다. 이 리즐링에도 “아 역시 독일인이야!”라고 손뼉을 치게 되는 사실이 있다. 맥주 순수령처럼 리즐링에 들어가는 포도도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다. 독일에서 생산되는 리즐링 와인은 리즐링 포도로만 만든 와인이어야 한다. 다른 포도를 섞어서는 안 된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리즐링 와인의 경우 리즐링 포도가 25%만 들어가도 리즐링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올 수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품질과 신뢰를 매우 중요시 생각하는 독일인의 문화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다른 나라에서 수입된 리즐링이 독일 라인가우나 모젤에서 생산된 리즐링보다 훨씬 달게 느껴지는 것도 이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한국인 중에 이전에는 리즐링을 종종 단맛 때문에 디저트 와인으로 여기거나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가 독일 리즐링을 마시고는 높은 산도와 강한 과일향, 무엇보다 드라이한 맛에 이제야 제대로 된 리즐링을 마셨다며 좋아한 사람도 있다. 그러니 독일에서는 와인이든 맥주든 언제나 100% 순수한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 없이 만끽하면 된다. 


수많은 백포도 중, 왜 리즐링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포도가 되었을까? 역사적으로 리즐링이 붐이 일으키게 된 계기가 몇 가지 있었다. 1716년 풀다의 대수도원에서 라인가우 요하네스 베르그에 있는 작은 수도원을 산 뒤 주변에 정말 방치되어 있던 포도 농장을 완전히 복귀시켰다. 당시 이미 뤼데스하임, 에버바흐 등지에서 리즐링 포도 재배가 성공적으로 잘 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구매한 포도를 농장에 심었다. 이것이 포도 재배의 기준이 되어 곧, 주변 지역에도 리즐링을 심으라고 공포했다. 1787년에는 트리어의 선제후인 클레벤스 벤제스라우스가 경쟁력이 없는 다른 종류 포도를 모두 리즐링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덕분에 모젤 강 주변과 라인 강 주변이 독일에서 리즐링 와인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포도 농장 지역이 된 것이다.  

4월~9월에 독일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리즐링으로 유명한 라인가우(Rheingau) 지역에 일일 투어를 해보길 추천한다. 프랑크푸르트에서 30분이면 닿는 뤼데스하임(Ruedesheim)은 특히 아기자기한 마을 길이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한 장면같이 예뻐서 외국 관광객에게 인기가 많다. 드로 젤 가세(Drosselgasse)라 불리는 이 거리에는 작은 규모의 귀여운 와인 바와 식당이 줄지어 손님을 반긴다. 대부분 오래전부터 이 마을을 지키는 곳이라 어딜 들어가도 실패할 확률이 낮다. 미로 같은 좁은 거리의 마을을 실컷 구경하다 발 밑에 펼쳐지는 포도 농장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도록 케이블카를 타도 좋고, 드넓은 포도 농장을 지그재그로 걸어 올라가 꼭대기에 있는 거대한 니더 발드 기념 동상을 뒤로하고 라인 강바람을 만끽하는 것도 좋다.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8월에 열리는 와인 페스티벌이 열리면 마을 전체가 온통 축제 장이 된다. 북적거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면 그 해 생산된 신선한 와인을 다양하게 마실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인 만큼 방문해 보면 좋겠다. 코블렌츠, 본까지 이어지는 라인강의 길을 따라 자전거 여행을 하는 독일인도 많다. 몇 시간씩 자전거를 타고 도착한 다음 마을에서 또 그 마을 와이너리에서 생산된 리즐링을 마셔보고 비교해 보는 재미도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해 볼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다. 


청량함이 가득한 압펠바인(Apfelwein)    

2013년 9월, 프랑크푸르트 근교에 사는 친구를 방문했을 때였다. 친구가 집에서 30분 정도 걸어가면 막 만든 그 해 첫 압펠바인(Apfelwein, 사과와인)을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영국에서 잠깐 지내던 때 즐겨 마셨던 사이더와 비슷한 술인가 보다 짐작만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따라나섰다. 9월이지만 아직 여름철 더위가 도로 전체에 가라앉아 있어 고작 30분을 걷고는 땀을 뻘뻘 흘렸다. 그곳에 도착해 압펠바인을 주문하니 어려서 약수터에 들고 가던 커다랗고 네모난 플라스틱 물통에 한 가득 담아 주셨다. 색깔만 보면 사이더와는 정말 다르게 뿌옇고 탁한 것이 모래와 흙을 마구 섞어 흔들어 놓은 계곡물처럼 같았다.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아직 완전히 숙성되지 않았으니, 집에서 며칠 더 숙성을 시켜 마시라고 당부하셨다. 

그런 아주머니의 친절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땀을 흘리며 걷다 지쳐버린 우리는 서로를 보며 “우리 이거 한 모금만 마실까? 너무 목말라..”라고 한마음 한 뜻으로 이야기했다. 살짝 뚜껑을 열어 3l짜리 통을 번쩍 세워 들고 그 채로 숙성도 되지 않은 사과 와인을 사과 주스인 냥 갈증이 가실 때까지 한참을 마셨다. 시큼 텁텁한 것이 조금 맛이 간 사과 주스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5분을 더 걸어가다가 멈춰버렸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을 정도로 완전히 그사이 취해버린 것이었다. 정신은 말짱한데 온 몸이 취한 것 같은 기분,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것 같았다. 숙성되지 않은 첫 압펠바인에 들어있는 5%의 알코올의 위대함을 그때 느꼈다. 


독일 압펠바인은 헤센이 원조 격이다. 헤센 주를 지나는 라인 강 근처가 기후적으로 오래전부터 리즐링 포도가 잘 자라 이 곳에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는 곳이 몰려 있었는데 16세기 아주 혹독한 겨울 추위 때문에 포도 농사가 크게 망해 버렸다. 따라서 와인을 만드는 사람들이 포도 대신 와인을 만들 수 있는 대체 과일을 찾다 사과가 추위에도 잘 견딘다는 것을 알고 사과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게 되었다. 


압펠바인 생산으로 유명한 곳은 헤센 중에서도 프랑크푸르트의 작센하우젠(Sachsenhausen)이라는 번화가이다. 가을에 이 지역에 있는 레스토랑이나 압펠바인 와이너리를 방문하면 가장 신선한 것을 마실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명한 허브 소스가 곁들여진 슈니츨의 느끼함을 이 압펠바인이 단번에 잡아 주어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다. 다른 와인과는 달리 이 압펠바인은 와인 잔에 마시지 않는다. 주전자 모양의 밤벨(Bambel)이라는 사기로 만든 병에 담은 와인을 0.25ml짜리 유리잔에 따라 마신다. 이 밤벨은 헤센 지역에서 매우 사랑받는 기념품 중 하나다. 밤벨에 든 와인을 마시고 있으면 어쩐지 16세기로 돌아간 느낌마저 든다. 


사이더와는 달리 본래 독일 압펠바인은 탄산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를 압펠바인 푸어, 즉 순수한 사과 와인이라고 부른다. 압펠바인으로 유명한 식당이나 와이너리에 가면 대게 이 푸어를 준다. 그러나 음료에서만큼은 유연성을 뽐내는 독일인인지라 이내 압펠바인에 탄산수를 1/3쯤 섞은 탄산 사과 와인도 판매하는 곳이 있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글루바인처럼 이 흰색의 사과 와인도 종종 따뜻하게 데워 마시기도 한다. 글루바인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계피와 설탕을 넣어 만든다. 

 

온몸을 녹여주는 글루바인(Gluhwein)  

참 온몸이 배배 꼬일 정도로 지루하고 긴 독일의 겨울이지만, 이 겨울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버티게 해주는 것이 이 글루바인(Gluhwein)이다. 글루는 영어로 glow, 즉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는 것을 뜻한다. 한겨울 야외에서 머그잔에 담긴 따뜻한 글루바인을 한 잔 마시면 온 몸이 어느덧 후끈후끈 해지고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붙여진 이름인가 보다. 레시피는 지역마다, 그리고 만드는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드라이한 레드 와인에 오렌지, 물, 설탕, 계피, 럼을 섞어 따뜻하게 데운다. 잔을 받아 들면 은은하고 깊게 풍기는 계피 향 덕에 이미 술이 당기지 않았던 사람도 이내 술 욕심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슈퍼에 가면 큰 병에 담긴 글루바인을 쉽게 구매할 수 있어 친구들 또는 가족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냄비에 살짝 데운 글루바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약한 불에 천천히 데운 글루바인을 옆에 두고 캄캄한 거실에서 영화를 틀어 놓고 마시기도 하고 또 책을 보며, 카드 게임을 하며 와인을 즐긴다. 그냥 보고 있으면 핫 초콜릿을 먹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모두가 편안해 보인다. 혹시나 옆에 있는 어린아이가 ‘머그잔에 있는 그 맛있는 음료, 나도 마실래!’라고 떼를 쓸까 봐 킨더푼쉬(Kinderpunsch)라고 글루바인과 비슷한 맛에 알코올만 없는 포도 주스도 개발했다. 와인을 마시지 못하지만 글루바인이 어떤 맛일까 궁금한 사람은 이 킨더 푼 쉬를 마셔보면 된다. 글루바인의 단 맛 때문인지 아니면 그 안에 추가된 럼 때문인지, 이 와인을 먹고 취하면 다른 술과는 달리 마음속에 있는 깊은 생각을 꺼내어 나누게 된다. 누군가와 진실게임을 해야 한다면, 가장 적합한 술이 아닐까 싶다. 독일에 철학자나 위대한 작가, 예술가가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또 이 글루바인이 아닐까 맘대로 짐작도 해본다.  

글루바인은 독일인들이 사랑하는 크리스마스 마켓의 상징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 4주 전부터 전 지역에서 열리는 야외 마켓에는 글루바인을 마시기 위해 방문하는 독일인들과 관광객들로 언제나 붐빈다. 마켓마다 글루바인 머그잔이 다양한데 어떤 것은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것처럼 투박한 매력이 있는 반면, 또 어떤 곳은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관련 그림이 있어 무척 예쁘다. 그래서 와인을 다 마시고 기념으로 머그잔을 스윽하고 몰래 가져가 버리는 사람이 많아 와인을 시킬 때 머그잔 보증금을 함께 지불해야 한다. 보증금 값이 와인 한 잔 값만큼 비싸 취해서 정신 줄을 놓지 않고서야 꼭 잔을 반납하고 보증금을 되돌려 받아야 하지만 정신없이 놀다가 깜박하고 어딘가 놓고 가는 경우가 꼭 생긴다. 이렇게 버려진 머그잔을 회수해 반납한 뒤 보증금을 채가는 보증금 좀도둑이 있어 추가 방편으로 주문한 와인 잔 개수만큼 토큰을 주어, 토큰과 머그잔을 함께 반납했을 시에만 보증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정직과 신뢰를 큰 가치로 여기는 독일인이지만 역시 술 앞에선 장사 없나 보다. 

 



이전 09화 카니발을 손꼽아 기다리는 서독 사람들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독일을 즐기는 건배사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