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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종결자 May 31. 2019

독일의 네 가지 얼굴 3편. 동부 – 베를린과 드레스덴

동부 지역에 방문하면 가장 당황스러운 것이 바로 언어였다. 많이 늘었다고 자만하는 순간 그곳 출신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해 역시 내 실력은 쓰레기였구나 하면서 자책감에 빠지곤 했다. 표준어에만 익숙한 사람이라면 라이프치히 서브웨이 상점에서 샌드위치 하나 주문하는 것도 헤매게 된다. 독일인들 사이에서도 작센 주의 사투리는 늘 ‘가장 듣기 싫은 사투리’ 1위로 꼽히는 불명예를 안는다. 유튜브나 인터넷에는 이 지역 사투리를 따라 하는 영상이 많다. 물론 수위가 높은 조롱도 많다. 


동독은 통일 후 30년 가까이 되어 가는 지금도 여전히 가난함에 허덕이고 있다. 매월 월급에서 5.5% 빠져나가는 독일 연대 지원금(Solidaritätszuschlag) 중단해야 한다는 볼멘소리가 독일 이 곳 저곳에서 자주 나오지만 미개발된 동독 지역을 방문하고 오면 적어도 향후 100년은 독일 정부가 이 세금을 포기할 수 없겠구나 싶어 진다. 비교적 많이 발전되어 있는 베를린이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를 제외한 소도시에 가면 오히려 러시아나 로마니아의 시골 마을에 와 있는 느낌이 더 짙다. 황량하고, 사람이 없으며 건물 외벽에는 옛날 부흥했던 동독에 대한 향수나 현재에 대한 불만이 짙게 묻어 난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다. 옛 동독의 이름이던 DDR(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독일 민주 공화국)의 상징도 자주 눈에 띈다. 외국인에 대한 적대심이나 인종차별이 어느 곳보다 높기로 유명하기도 하다. 혼자서는 절대 극동 지역으로 여행가지 말라는 친구들의 당부가 너무 과장된 걱정이 아닌가 싶다가도 선거 때마다 극우 정당 득표율이 다른 어느 곳에 비해 확연히 높은 점이나 외국인 혐오로 인한 사건 사고 이야기를 들으면 꼬리를 내리게 된다. 독일 정치인들의 고민이 참으로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다. 

베를린 - 과거의 아픔과 미래에 대한 바람이 공존하는 곳 

동부 지역의 대표,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가장 독일답지 않으면서 또 가장 독일다운 도시이다. 독일에 사는 동안 참 많이도 갔던 베를린인데 갈 때마다 어쩌면 매번 그렇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처음 여행을 갔을 때는 그 어느 도시보다 젊은 사람들과 외국인이 엄청나게 많고 다들 저마다의 개성을 살려 알록달록한 유색 패션을 자랑하는 모습을 보고 여긴 독일의 수도가 아니라 런던의 어딘가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 마저 들었다. 두 번째 왔을 때는 분단의 역사, 나치의 대량 학살을 가감 없이 들려주는 박물관에 들렀다가 온종일 먹먹한 가슴을 달랠 길이 없었다. 세 번째 왔을 때는 베를린의 엄청난 클럽 문화에 충격을 받았고 또 이후에는 깨끗하고 우아하게 정리되어 있는 고급 건물, 세련된 신시가지의 쇼핑센터와 달리 조금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면 여전히 지저분하고 미개발에 허덕이는 가난한 지역이 극단적으로 공존하는 모습이 서울과 참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베를린 전 시장이 베를린을 ‘가난하지만 섹시한(poor but sexy)’ 도시라고 부른 건 이런 이유에서였나 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베를린이 궁금하다. 


베를린의 아픈 손가락, 베를린 공항 

파리 여행객 중 본래 생각했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모습과 다르게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파리의 모습에 충격을 먹어 ‘파리 증후군’을 겪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파리만큼은 아니지만 베를린에서도 누군가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열에 아홉은 베를린 공항 때문일 것이다. 현재 운영되는 베를린 공항 두 곳은 시외버스터미널보다 못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채 허덕이고 있다. 독일 정부는 늘어나는 이용객과 낙후된 시설을 대체하기 위해 베를린 브란덴부르크에 현대식 국제공항 허브를 짓기로 결정했고 이 화려한 공항은 계획대로라면 2011년에 문을 열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 7년이 지난 지금 이 공항은 아직도 여전히 굳게 닫혀 있다. 2020년에 문을 열겠다고 다시 수정 계획을 발표했지만 이미 6차례나 계획이 지연된 이력이 있는 탓에 독일인들은 자조 섞인 얼굴로 한숨을 쉰다. 합리주의와 실용주의 그리고 시간 엄수. 독일인을 따라다니는 세 가지 필수 수식어는 베를린 공항 사태로 인해 힘을 잃어 가고 있는 것 같다.  


2012년 봄. 이번엔 진짜로 공항을 오픈할 예정이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포함 1만 명에 달하는 게스트가 공항의 첫출발을 축하하기 위해 초대되었다. 그러나 3주 전에 이 거대한 행사가 취소되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의 이유는 화재경보기와 환풍기에 결함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조사 결과 그 이면에 엄청나게 큰 기술적 문제가 하나도 아닌 여러 개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공항의 지붕이 본래 설계된 것보다 2배나 무겁게 건축되어 불안정했고, 에스컬레이터는 너무 짧게 설치되었으며 독일 건축물에서 가장 중요한 소방서까지 이어지는 비상 통로가 잘못 만들어졌다. 게다가 90km가 넘는 케이블이 잘못 설치되었단다. 문제가 너무 많아 공항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고 짓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고 이는 건설 회사 외에 공항 영업을 준비하던 상점, 택시 회사의 연이은 파산과 또 다른 대형 예산 투입이 불가피하다는 악몽 같은 현실로 이어졌다. 어떻게 독일에서 이런 사태가 일어질 수 있었을까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작은 주택을 하나 지으려고 해도 땅 밑에 건드려서는 안 되는 나무의 뿌리가 있는지, 없애서는 안 되는 새 집이 있는지, 혹시 전쟁 당시 묻힌 탄환이라도 있는 지를 점검 후 설계 및 건축에 들어가고 화재경보기가 잘 작동되는지 마저도 2년마다 꼼꼼히 검사를 받아야 하는 독일인데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를 이렇게 망쳐버린 걸 보면 베를린 공항 설계자와 건축가가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다는 합리적 예측이 나올 수밖에. 물론 베를린 전 시장 클라우스 보베라이트(Klaus Wowereit)는 이 일로 시장 직에서 사임해야 했다. 처음 2천7백만 유로의 예산으로 시작했던 이 프로젝트는 이제 50억 유로를 삼키고도 그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독일의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끝도 없는 베를린의 이야깃거리  

독일은 2차 대전 직후 프랑스, 영국, 미국, 러시아가 각각 관할하는 4개의 지역으로 나뉘었다. 베를린은 그 네 개의 존이 모두 공존하는 카오스의 중심이었다. 2년이 지난 후에야 프랑스, 영국, 미국의 관할 구역이 하나로 통합되며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되었다. 그 사이엔 도시 중심을 흉측하게 가로지르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다. 베를린을 여행하는 동안 꼭 한 번은 보게 되는 이 장벽. 3.6미터 밖에 안 되는 높이인데 그 벽의 작은 파편 하나만 보고 있어도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오는 느낌이다. 장벽을 넘다가 사망한 사람의 집계된 숫자가 138명에 이르고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벽 위, 또는 벽 아래를 뚫고 도망가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감시가 늘어갈수록 더욱 은밀하고 영리하게 경계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중 베트케(Bethke) 3형제의 탈출 전략은 대다수 독일인들이 알고 있는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 중 하나로 회자된다. 1975년 잉고는 먼저 에어 매트리스를 타고 베를린 북쪽에 있는 엘베 강을 건너 서독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1983년 둘째 홀거는 작은 화살과 낚싯줄, 강철 케이블과 나무 도르래 이 네 가지 도구로 탈출에 성공한다. 그는 동독에 있는 5층짜리 아파트에 올라가 반대편 서독의 한 아파트 옥상으로 낚시 줄을 동여맨 작은 화살을 쏘아붙였다. 맞은편 아파트에 있던 친구가 그 화살을 받아 옥상 한쪽에 고정시켰고 그 낚싯줄을 따라 전기 케이블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전기 케이블 위에 나무 도르래를 올려 케이블을 타고 건너편으로 이동했다. ‘나 홀로 집에’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허술한 방법이지만 도움을 준 친구까지 모두 탈출에 성공한 걸 보면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세 형제 중 막내 에그버트는 더욱 화려하게 서독으로 도망쳤다. 믿기 어렵지만 그는 날아갔단다. 혼자가 아니라 그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동독으로 넘어온 잉고와 함께였다. 그들은 동독에서 운영하던 펍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여 작은 경비행기를 구매했고, 비행기 외관을 소련군의 비행기인 것처럼 장식했다. 물론 헬멧과 마이크를 착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 번째 시도 만에 서독의 국회 의사당 근처에 착륙해 결국 엄청난 영웅담 이야기와 함께 공식적으로 서독에 거주할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어제까지 아무것도 없던 우리 동네에 갑자기 철조망이 올라가고 시멘트로 만든 커다란 벽이 지어진다면 그리고 그 벽의 건너편에 어제까지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친구, 동료, 가족이 살고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을 하면 그제야 내가 처한 분단국가의 비극이 다시금 실감이 난다. 그래서인지 독일 사람들, 특히 베를린 출신의 사람들은 한국인에 대한 연민이 깊다. 어디에서 왔냐는 질문에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주저 없이 남북 관계와 통일에 대한 찬성 여부를 진지하게 묻는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고작 30년밖에 되지 않은 분단의 아픔과 통일 이후의 진통을 열심히 설명한다. 마지막에는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우연히 통일이 되어서 다행이라는 말과 대한민국도 얼른 평화롭게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는 바람의 인사를 잊지 않는다. 

베를린 중심에 위치한 유대인 대학살 추모관을 방문할 때면 꼭 손수건이나 휴지를 챙겨가게 된다. 추모관 입구 옆 야외 공간에는 커다란 비석들이 빼곡하게 세워져 있다. 나치 시절 학살당했던 유대인을 기억하고 위로하기 위한 묘석이다. 비석들 사이는 그늘이 감싸고 있고, 다른 곳에서 들리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아 갑자기 세상과 격리된 공동묘지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무덤도 관도 아니지만 그 커다란 공간 어느 한 곳에 가만히 서 있으면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마치 묘석 사이사이를 날아다니는 유대인의 혼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다. 입구에서부터 영혼이 털리는 느낌이다. 추모관 안으로 입장하면 누구 하나 소리 내지 않는 엄숙함과 경건함에 압도당한다. 숨 쉬는 소리조차 실례가 되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 처음 마주하는 벽에는 유대인이 학살당한 역사가 시간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어떤 곳에서, 어떤 유대인이 어떻게 학살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컴컴한 조명의 방 벽 면에는 아주 커다란 숫자들이 쓰여있다. 한 지역에서 학살당한 유대인의 수였다. 또 다른 방의 바닥에는 학살을 피해 도망 다니던 유대인들의 일기와 흔적, 죽음을 앞두고 기록한 메모, 절망에 빠진 엄마가 남겨진 가족에게 쓴 편지 등이 본래 형태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이제껏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만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내 나처럼 코를 훌쩍이고 눈물을 떨어뜨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렇게 적나라한 전시와 교육을 통해 과거 청산에 앞장서는 독일에서도 그 끔찍한 과거를 그리워하고 당시로 돌아가야 한다는 극우파 성향의 국민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왜곡된 역사 교육을 받고 자란 후손들은 얼마나 더 그릇된 과거의 향수를 갖게 될까 무섭기마저하다. 

 

2018년 봄이 완연했던 4월 베를린에 또 하나의 큰 뉴스가 터졌다. 500kg에 육박하는 대포가 발견되어 만 명이 넘는 시민이 대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를린 중앙역은 물론 박물관과 학교 등 큰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시내 지역이라 더욱 위험하여 폭탄이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모두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태였다. KMDB(Kampfmittelbeseitigungsdienst)라 불리는 독일의 폭탄 제거 처리 특공대원들이 와 안전하게 폭탄을 해체하면서 소동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폭탄을 제거하기 위해 특수 유니폼을 입고 출동하는 사람들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보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독일에서는 누구보다 부지런히 일해야 하는 경찰 소속 공무원이었다. 사실 독일에 살다 보면 일 년에 다섯여섯 번은 ‘어느 지역에서 폭탄이 발견되어, 제거를 위해 대피를 하고 있다’는 뉴스를 듣는다. 폭탄이 발견되는 지역이 내가 사는 동네인 경우도 두 차례나 있었다. 세계 2차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독일은 전쟁의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구나, 어쩌면 아직도 그 전쟁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년 독일에서는 2천 톤이 넘는 탄약이 발견된다고 한다. 옛 폭탄이 터져 많은 시민이 사상당한 큰 사고는 없었지만 폭탄을 제거하다 사망한 폭탄 제거 특공대원, 공사 중에 땅 밑에 묻힌 탄환을 건드려 사망한 노동자의 소식을 들으면 끔찍하다. 게다가 해가 갈수록 오래된 포탄의 제거가 훨씬 더 어려워지고 더 위험해진다고 하여 걱정도 함께 늘어 간다. 함께 베를린을 여행하던 친구는 새로운 건축물을 지을 때마다 그곳에 폭탄이 있는지 철저하게 점검하고 확인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또 어디선가 이렇게 포탄이 나오는 걸 보면 자신들이 저지른 악명 높은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까지 한 세기가 걸릴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분단의 역사보다 더 크게 독일인들을 짓누르는 것은 전쟁의 역사임이 분명하다.


화려한 역사가 건축물에 그대로 녹아 있는 드레스덴 

구시가지가 가장 아름다운 도시는 드레스덴이라고 마음을 굳혔다. 엘베 강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드레스덴의 모습은 말 그대로 그림 같다. 화려하고 찬란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이 곳이 세계 2차 대전에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곳이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드레스덴은 2차 대전이 거의 끝나갈 때, 즉 나치의 패배가 완전히 확실해졌을 때까지도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다.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 이 3일 동안 받은 공습에서 2만 5천 명이 넘는 시민이 사망했고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2차 대전 이후의 드레스덴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면 처참하다 못해 절망스러울 정도로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만이 보인다. 겨우 몇 개의 건물 외벽만이 힘들게 버티고 있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몇십 년 만에 어떻게 이렇게 도시를 재건할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어 자꾸만 옛 사진을 찾아보게 된다.  

드레스덴의 구시가지를 아름답게 빛내는 츠빙거(Zwinger) 궁전, 드레스덴 성, 젬퍼 오페라 하우스(Semperoper)와 프라우엔 교회(Frauenkirche)를 건물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건물의 벽돌 색이나 건물을 꾸미고 있는 조각상의 색이 고르지 않고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부분은 아주 어두운 고동색을 띠고, 또 완전히 검은색으로 보이는 것도 있으며 또 다른 한쪽은 밝은 베이지 색을 띤다. 드레스덴 건물은 모두 사암을 사용했는데 이 돌은 시간이 지날수록 산화되어 검게 변하는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어두운 부분이 많은 벽돌은 전쟁 중에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거나 다시 수집되어 재건축에 사용된 오래된 돌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많은 건축가들과 도시 계획자들이 모여 논의를 하기 시작했고 건물들을 빠른 시간 내에 다시 짓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건물 외벽이나 골조를 유지하고, 건축 자재를 재활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땅에 부서져 내린 돌무더기를 직접 치워 나르고 그 속에서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사암들을 솎아 내어 다시 건물에 투입하면서 지금과 같은 특별한 모습으로 재 탄생한 것이다. 전쟁 중에 화염 폭탄을 맞아 까맣게 그을린 것이 아니라는 재건축의 역사가 건물 안에 녹아 있었다는 것이 정말 흥미롭다.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가의 길’ – 작센 슈바이츠 국립공원 

드레스덴에서 기차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닿을 수 있는 극동 지역에 체코와 사이좋게 절반을 나누어 가진 커다란 국립공원이 있다. 독일에 있는 공원은 작센 슈바이츠 국립공원으로, 체코 국토에 있는 부분은 체스키 슈비 차르스코 국립공원이라고 부른다. 오래도록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너무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보니 접근성이 좋지 않아 계속 미루어 왔던 목적지였다. 게다가 뮌헨에 사는 동안 알프스 산맥에 있는 등산로란 등산로, 호수란 호수는 다 가보았을 정도라 이 작센 슈바이츠 공원의 산에 대한 호기심이 아주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착 첫날부터 내 오만했던 생각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이곳은 특별했고, 낭만적이며, 황홀했다. 여행 책자나 인터넷을 찾아보면 어디든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라고 소개된다. 그리고 그 소개 문구는 정말 과장이 아니다. 지금도 누군가 독일에서 꼭 한 곳만 여행해야 한다면 어디를 추천하겠느냐고 묻는다면 그 어떤 대도시나 알프스가 아닌 이 화가들의 길(Mahlerweg)을 알려줄 테니 말이다. 


작센 슈 파이츠 공원에서 바스타이(Bestei) 다리는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암반 성상이자 이 공원의 첫 번째 랜드마크이다. 1824년에 처음 지어진 다리는 목재 다리였으나 1851년 사암으로 다시 지어졌단다. 사암과 바위의 색과 질이 완벽히 조화롭기 때문인지 멀리서 보는 모습이 마치 바위와 다리가 원래 늘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바스 타이를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슈타트 발렌(Stadt Wehlen)이나 라텐(Rathen)이라는 작은 기차역에서 40분가량 화가들의 길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다. 두 기차역 중 한 곳에서 출발하여 바스 타이를 구경한 뒤 다른 한 기차역으로 내려오면 전 구간에 다른 풍경을 감상하는 일석이조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올라가는 산 길은 울창하게 우거진 숲 사이 각기 다른 모양의 바위와 바위 절벽, 골짜기가 눈을 즐겁게 해 준다. 굉장히 깨끗하게 잘 보존되어 있어 평소에 잘 보지 못하는 다양한 달팽이도 자주 만난다. 집이 있는 달팽이와 없는 달팽이, 검정 달팽이와 흰 달팽이, 빨간 달팽이를 구경하며 걷다 보면 순식간에 바스 타이에 다다른다. 마침내 다다른 바스 타이 다리에서 보는 릴리엔 슈타인 산, 쾨니히슈타인 요새, 엘베 강과 강 옆의 마을의 풍경은 도무지 묘사할 길이 없다. 

구경을 마치고 라덴이나 발렌 마을로 다시 내려오면 기차역까지 가기 위해 엘베 강을 건너는 통통배를 타게 된다. 한 번 배를 타는데 1~2유로가 들고 거의 항상 30분 간격으로 배가 다녀 불편함은 없다. 이 정도의 관광객이면 엘베 강, 적어도 기차역 근처에는 다리를 지을 법도 한데 왜 여전히 이렇게 통통배를 운영하는 걸까 궁금해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아주머니께 여쭈어봤더니 첫 번째는 자연의 경관과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작센 슈바이츠 공원에 가장 중요한 의무이기 때문이고 둘 째는 아무리 관광객이 많다 한들 다리를 짓는 것보다 통통배를 운영하는 것이 훨씬 비용이 저렴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래, 이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에 다리를 또 하나 짓는다면 옛날 이 길을 걸으며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의 작품 속의 엘베 강과 주변 마을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 되겠지. 게다가 공사 내내 강 아래에 있는 많은 생물들이 고통스러워할 테고 통통배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먹고 살 방법이 또 하나 없어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음날 배를 타니 있는 정 없는 정이 다 드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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