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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종결자 Nov 24. 2020

한 번 안아주고 가지

지팡이로 머리를 세게 맞은 어느 날의 기억 


엄마는 지금도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왜 아부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나 한 번 꼭 안아주지도 않고 고맙다고 말도 안 했을까'라고 한탄한다. 할아버지는 경제적으로는 장사하던 할머니에게 의지했고, 집안일과 아들 양육은 엄마에게 온전히 의지했다. 나이 여덟 살부터 남동생들을 씻기고, 도시락을 싸고 청소를 했다던 엄마의 어린 시절이 눈 앞에 훤하다. 


엄마에게 주지 못한 애정표현을 할아버지는 엄마 딸=나에게 두배로 갚아주었다. 어릴 때부터 나를 그렇게 예뻐하던 할아버지. 그를 떠올릴 때면 지하철 사건이 자연스레 가장 먼저 기억난다. 


그때는 내 나이 19살, 예민 보스의 극을 달린다는 고3이었다. 중간에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어 안양에서 서울로 지하철을 타고 통학을 하던 때였다. 아침 7시에 지하철을 타고 또 늦은 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했다. 그날도 아침 일찍 지하철에 탔는데 매우 운 좋게 빈자리가 난 것이었다. 와아아우! 앉자마자 나는 눈을 감았고 몇 분 안 되는 시간 동안 꿀잠을 잤다. 그때 갑자기 머리에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큰 고통이 밀려왔다. 이거 뭐지? 하고 눈을 뜨기도 전에 들려오는 어떤 노인의 목소리. "요즘 애들은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 어디 어른이 오는데 자리 양보도 안 하고 시퍼렇게 젊은 게 자는 척이야?" 눈을 떠보니 딱 하는 소리는 그 할아버지가 들고 있는 지팡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지팡이는 이제 내 눈 앞에서 빨리빨리 꺼지라는 사인을 주었다. 그 나이에도 순간 꼭지가 열리고 심장이 빨리 뛰고 화가 나고 분해 "왜 때려요!!!"라는 외침이 바로 나왔지만 기차 화통 삶은 목소리로 역성을 내는 할아버지와 계속 말다툼을 할 자신까지는 없었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알지도 못하는 할아버지에게 지팡이로 머리를 후려 맞은 이야기를 하는데, 계속 수다를 떨다 보니까 그 상황이 좀 우습게 느껴졌다. 그렇게 그 일도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다음 날 저녁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갈빗집에서 오랜만에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웃자고 이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갑자기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되면서 식당이 떠나가라 "그런 미친 영감탱이를 봤나!!! 너 몇 시에 지하철 탔어!!!! 그 영감탱이가 무슨 역에서 탔어!! 이 망할 놈의 영감탱이 내가 잡아서 족쳐야지 어디 공부하느라 쌔빠지는 학생들 불쌍하다고 토닥이지는 못할 망정 내 손녀 머리를 쳐? XXXXXXXX XXXXX XXXX (워낙 욕을 하셔서 삐 처리 중)"며 소리를 지르는 거였다. 


할아버지는 씩씩거리며 오래도록 화를 삭이지 못했다. 그 바람에 굽고 있던 갈비는 조금 타버렸다. 할머니 말로는 할아버지가 그날 밤 집에 가서도 밤새 욕을 하시더니 다음날 지하철 역사에 가서 CCTV가 있는지. 이렇게 저렇게 생긴 늙은 노인이 지팡이 들고 지나가는 거 보면 연락 꼭 달라고 역사에 있는 직원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왔단다. 물론 그런 연락 따위가 올리는 없었지만.


나는 그 날 그 충혈된 눈과 뻘게진 얼굴의 할아버지가 가장 그립다. 그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여 지금도 지하철을 탈 때는 할아버지의 보호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할아버지가 나도 꼭 품에 안아준 적은 없는 것 같지만 분명히 엄마에게 줘야 했을 사랑까지 몰아주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엄마랑 헤어질 때마다 할아버지 몫까지 엄마를 꼭 안아준다. 엄마는 내게 아이처럼 푹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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