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피종결자 Dec 02. 2020

운수 좋은 날

aka. 김장하던 날 


나는 올해, 사실은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다. 집에만 박혀 있는 동안 무척이나 우울했지만 1월부터 한 달 한 달을 되짚어보니 그랬다.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의지가 되는 친구들이 생겼고, 새로운 팀과 인연을 맺으며 재미있는 일을 했고 승진을 했다. 12월부터 쏟은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지만 계속 새로운 인연이 인생에 들어와 마른눈을 채워주었다.



지난주 엄마 집에 남편과 함께 김장을 도우러 갔다. 내게 도와달라고 해놓고선 막상 가니까 엄마는 이미 절반이 넘게 김장을 다 해놓고 있었다. 도와달라는 마음보다는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딸과 사위가 고생할까 봐 전날 밤부터 아빠와 그 많은 배추를 옮겨가며 작업을 해 놓은 모습을 보면 그 마음을 읽는 것쯤은 어렵지가 않다. 그럼에도 좀 더 일찍 올걸, 늦잠을 자느라 늦게 온 내가 또 반성이 된다. 


마지막 남은 두 소쿠리 정도의 배추 양념은 남편의 몫으로 미루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소파에 앉아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을까 싶어서 억지로 임무를 주었다. 그런데 남편은 김장 샛별이었다. 나보다 훨씬 손이 야무지다. 빠르지는 않지만 꼼꼼하게 양념을 잘 묻힌다. 엄마는 연신 칭찬을 한다. 다음에 또 시키려고 칭찬을 하는 거 아니냐고 남편이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나는 안다. 성미가 급한 내가 대충 해대는 양념보다 남편의 김치가 더 맛있을 거라는 걸. 


난생처음 남편이 김장을 도왔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시부모님에게 하니, 시아버지가 "아들을 고마 뺐기뿠네!!! 네가 그럼 우리 집 딸내미로 오너라!" 라신다. "아버지 저 데려가시면 저희 아버지 매일 같이 울다가 금방 돌아가실 거예요 우리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는 안돼요 손 씨 딸내미 못해요~"라고 딱 잘라 말했다.  


김장을 끝내고 모두가 마당에 나와 광합성을 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하늘을 보고 있던 엄마가 말을 꺼낸다.

"엄마가 며칠 전에 갑자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면서 너무 마음이 불안한 거야. 네가 승진했다고 전화해준 날, 참 잘됐다. 마음고생한 우리 딸 잘됐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다가 돌아서는데 갑자기 네가 어렸을 때 길 가다 마주친 할아버지가 너는 다 좋은데 명줄이 짧아!라고 했다던게 생각이 나는 거야. 그 생각이 나니까 엄마가 너무 불안해서 잠이 안 오고, 우리 딸 이제 좀 잘 풀리는데 무슨 일이 또 생기는 건 아니겠지? 하면서 온갖 걱정이 다 들더라고...." 

나는 놀라서 엄마의 말을 자른다. 

"엄마, 누가 보면 내가 무슨 복권이라도 당첨된 줄 알겠어- 아무리 명줄이 짧아도 내가 벌써 죽으면 어떡해~ 그런 생각 하지 마, 그 할아버지만 그런 거지 나 다른 데서 운세 보면 그렇게 말년에 운세가 좋대. 엄마 아빠보다 오래 살 거야" 

옆에서 듣던 남편은 

"아니 장모님!! 무슨 운수 좋은 날도 아니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역성을 냈다. 


엄마는 불안함에 대해 얘기하다 역성 내는 내 남편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그런데 돌아서서 생각하니까, 손서방이 운이 참 좋댔잖아. 손서방이랑 결혼해서 나래가 명줄이 짧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것들도 다 상쇄가 되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안심이 되더라고. 둘이 같이 있어서 다행이야. 엄마는 둘을 함께 보니까 이제 안심이 돼"  


남편이라는 새로운 인연이 나를 정말 운수 좋은 날에서 구제해 준 것일지도 모른다.

남편의 좋은 운발이 생사를 알 수 없는 우리 달봉이에게도 꼭 닿았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