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스페셜 미드나잇 2부
전단지 약도를 보니, 위치는 진수네 동네였다.
나는 전단지를 세 번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냥 버려도 될 종이였지만, 그녀가 앞에서 길바닥에 던져 버릴 수는 없었다.
보급소로 향하면서도 전단지에 적힌 날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10월 28일, 24시'
그때가 되면 정말 그림 속처럼 사람들이 하늘로 끌려 올라간다는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쳇,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개학을 하고 며칠 후, 내 책상 위에 도시락가방이 올려져 있었다.
감사하게도 진수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 보내주신 반찬이었다.
진수 어머니는 내가 혼자 자취한다는 걸 안 뒤로, 한 달에 한 번씩 나물이나 마른반찬을 챙겨 진수 손에 들려 보냈다.
그럴 때면 나는 진수를 자취방으로 불러 함께 점심을 먹곤 했다.
예전엔 하숙할 때는 종종 점심도시락을 같이 먹었지만, 내가 자취를 시작한 뒤로는 함께 점심을 먹은 날이 많지 않았다.
다만 내가 월급을 받는 날이면 매점 진수를 데리고 가 컵라면과 음료수를 쏘곤 했다.
4교시가 끝나자마자 진수와 함께 옥탑방으로 향했다.
오늘 점심 메뉴도 라면이었다.
진수 어머니가 싸준 맛있는 반찬이 있다지만, 우리에겐 그저 라면이 최고의 메뉴였다.
밀가루 맛에 질릴 만도 했지만, “이제 도저히 못 먹겠다”라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부엌 찬장에는 늘 라면이 쌓여 있었다.
냄비에 물을 붓고 분말수프를 뜯어 넣은 뒤 가스불을 켰다.
그 사이 면은 반으로 쪼개 놓고 김치를 잘게 썰어 두었다.
물이 끓자 면과 계란 두 알을 톡 깨 넣었다.
마지막 1분이 남았을 때 잘게 썬 김치를 넣어 끓였다.
내가 즐겨 먹는 김치라면이었다.
진수는 도시락 가방에서 밥과 계란말이, 비엔나소시지 볶음을 꺼내 상에 올려놓았다.
상 한가운데는 비워 두었다. 잠시 후, 김치라면이 냄비째 상 가운데를 차지했다.
소박하지만, 나름 푸짐한 밥상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설거지는 진수가 맡았다.
내가 그냥 두라고 했지만, 진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엄마가 야간근무할 땐 우리 집 설거지 담당이 나야. 그러니 설거지는 나한테 맡겨.”
나는 더 말리지 않았다.
진수가 싱크대 앞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나는 라디오를 켰다.
흘러나온 곡은 이현우의〈꿈〉이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봉봉과 쌕쌕 주스를 상에 올려 두자, 진수는 흥얼거리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났다.
잠시 후, 설거지를 마친 진수가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진수에게 봉봉 주스를 내밀며 물었다.
“진수야, 너네 교회 이름이 예수강림교회야?”
“아니. 갑자기 그건 왜?”
“며칠 전 역전 사거리에서 어떤 아줌마가 전단지를 나눠주더라. 약도 보니까 너네 동네길래.”
“요즘 휴거로 신도 모으려는 교회가 한둘이어야지. 사이비 천지야.”
“사이비? 그러는 너네 교회는?”
“우리 교회가 원조야. 휴거를 제일 먼저 설파했거든. 원조가 아니면 다 사이비지, 뭐.”
“쳇, 어이가 없네. 정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한테 나무라는 소리 같았다.
내가 코웃음을 치자, 진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튼 한심해.”
“뭐가?”
“뭐긴, 그런 걸 믿는다는 자체가. 너를 포함해서.”
“오영아, 그건 네가 진리를 몰…”
진수가 반박하려는 듯 말하다가 멈추더니 눈을 번뜩였다.
“야, 너 나랑 내기할래?”
“내기? 무슨 내기?”
“10월 28일, 밤 12시. 휴거 일어난다? 안 일어난다에?”
“하하하…. 나야 좋지. 뭘 걸 건데?”
“십만 원 빵 어때?”
진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씩 웃었다.
“좋아. 근데 너 무르기 없기다.”
“없어. 너나 무르지 마.”
“오케바리. 좋았어. 근데 너 수중에 십만 원은 있긴 하냐?”
“그런 걱정 마. 내가 너한테 돈 줄 일은 없을 테니까.”
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근거 없는 진수의 자신감이 우습기도 하고, 어쩐지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 네 말이 맞는다 쳐, 근데 네가 하늘로 훅 올라가 버리면, 돈은 어떻게 받을 건데?”
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어… 그걸 생각 못했네.”
“내 말이 맞으면, 넌 십만 원 꼭 줘야 된다. 꼭”
“야, 잠깐만, 이거 내가 손해 같은데?”
“인마, 네 말대로면 휴거가 된다며. 뭐가 문제야.”
따져보면, 이래나 저래나 득을 보는 건 나였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만큼은 휴거니 종말이니 하는 말이 그저 둘만의 농담거리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라디오에서 DJ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요즘 세상, 참 많이 어지럽죠. 주변을 둘러보면 마치 신기루를 좇듯 헤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혹시 우리 가요광장 청취자 여러분 중에도 그런 환상에 푹 빠져 계신 분은 없으신가요?”
마치 청취자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짧은 정적이 흘렀다.
“혹시라도 그렇다면, 하루빨리 그 환상에서 벗어나시길 바라겠습니다. 자, 이어서 들으실 곡은 서태지와 아이들의〈환상 속의 그대〉.”
멘트가 끝나고 경쾌한 전주가 흘러나오자, 진수는 곧바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도 초반에 따라 부르다가,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진수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그대의 환상, 그대는 마음만 대단하다.
그 마음은 위험하다.
자신은 오직 꼭 잘 될 거라고 큰소리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대가 살고 있는 모습은 무엇일까?
환상 속엔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환상 속의 그대 가사 중 일부>
노래가 끝나자 진수가 말했다.
“가사가 죽이지 않냐?”
난 바닥에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우며 말했다.
"야, 꼭 너한테 들으라고 하는 얘기 같다."
"무슨소리야 그게."
"하늘로 올라갈거라는 환상 속에 살고 있잖아. 지금"
진수는 얼굴을 찡그러더니 웃었다.
가사를 곱씹을수록 내겐 그 가사가 마치 진수, 피켓녀, 그리고 아버지를 향한 꾸짖음처럼 들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진수가 불쑥 물었다.
“오영아. 우리 교회에서 그날을 뭐라고 하는 줄 알아?”
“그날? 아-, 그날. 뭐라고 하는데?”
“스페셜 미드나잇.”
무슨 첩보 영화에나 나올 법한 프로젝트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셜 미드나잇? 오~ 영어로 하니까 왠지 있어 보이는데.”
“내게 그날이 정말 특별한 날이 되었으면 좋겠어.”
“어떻게?”
“어떻게 긴, 하늘로 올라가서 주 예수를 영접하는 거지.”
진수는 진지한 얼굴로 창문 밖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는 검지 손가락으로 진수의 뒤통수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환상 속의 그대다. 정말.”
진수는 나를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이 천진난만해서 순간 나도 따라 웃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안쓰러움이 남았다.
그날은 수금을 하느라 신문을 배달한 지 한 시간 십 분쯤 지나서야 마지막에서 두 번째 집에 도착했다.
수금철을 펼쳐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
예순다섯 번째 구독자 이름은 ‘이하나’다.
하지만 지난 두 번의 수금 때 마주친 이는 이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중년의 남녀였다.
대문 기둥에 문패를 봐도 성 한 글자만 같을 뿐이었다.
아마도 고지서의 구독자 이름으로 봐선 이 집 자녀의 이름일것이다.
두 번의 초인종 소리에 응답하는 이는 없었다.
신문을 대문 손잡이에 꽂아 넣고 마지막 집으로 향했다.
마지막 집 대문 앞을 지나며 대문을 향해 신문을 던졌다.
신문은 대문과 처마 사이의 좁은 틈을 정확히 통과해 날아간 뒤 벽에 부딪혀 현관 바닥에 떨어졌다.
여느 때처럼 벽에 맞는 소리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내가 배달을 시작한 이후 석 달 가까이 이 집에서 한 번도 배달사고가 없었다.
그 사실이 내게 안도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풀리지 않은 숙제를 억지로 덮어둔 듯한 찜찜함을 남겼다.
배달을 마치고 보급소로 돌아가는 길, 짧았던 그림자는 어느새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남산 고가도로 아래 다리를 지나 골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야! 거기 자전거.”
저 앞에서 낮고 거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십여 미터 앞, 다섯 명이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순간, ‘수금 기간에는 돈을 노리는 불량배를 조심하라’ 던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핸들을 움켜쥐고 속도를 올렸다.
그러나 놈들이 양옆으로 벌려 서서 길을 막는 순간,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브레이크를 잡자,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자전거가 급정지하며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때,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몇 달 전, 교실에서 진수의 워크맨을 빼앗으려다 내게 혼쭐이 났던 바로 그 덩치였다.
그때 이후로는 얼씬도 안 하던 놈이, 이번엔 무리를 거느리고 나타난 것이다.
“야. 자전거에서 내려.”
덩치의 목소리였다.
난 자전거에서 내려 세워놓고 허리춤에 둘러밴 수금백을 허리 뒤로 돌려놓고 쌕 끈을 단단히 조였다.
그때 한 놈이 갑자기 자전거 앞바퀴를 발로 걷어찼다.
순간 자전거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고 바구니 안에 배달하고 남은 신문이 땅바닥으로 흩어졌다.
발로 걷어찬 놈이 낄낄대며 웃었다.
“이놈 맞아? 별거 아닌 놈처럼 보이는데.”
덩치 옆에 있던 놈이 덩치에게 물었다.
덩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이 새끼가.”
다행히 돈을 노리고 날 불러 세운게 아니었다.
놈들은 모두 사복 차림이었지만, 어투를 보아하니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불러 모은 게 분명했다.
난 아무말 없이 쓰러진 자전거를 일으켜 세워 담벼락에 기대놓고서 땅에 흩어져 있는 신문을 추스려 바구니에 넣었다.
그때, 가장 먼저 달려든 건 역시 덩치였다.
어깨를 부풀리며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예전과 똑같은 기습공격이었다.
난 재빨리 왼발을 뒤로 빼며 상체를 틀었다.
덩치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짧은 훅을 복부에 꽂았다.
퍽-.
주먹이 배를 파고들자 덩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도 덩치의 멍청한 공격은 내게 먹히지 않았다.
옆에서 또 다른 주먹이 날아왔다.
나는 왼쪽 팔뚝으로 주먹을 걷어냈다.
충격이 팔뚝을 타고 전해졌지만 곧바로 오른 주먹으로 상대의 턱을 갈겼다.
‘퍽-’ 놈이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뒤로 나자빠졌다.
이번엔 두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한 놈은 주먹을 휘두르고, 다른 놈은 온몸으로 들이받았다.
나는 허리를 틀어 주먹을 피한 뒤, 들이받던 녀석의 뒷목을 움켜쥐어 무릎으로 연거푸 찍었다.
그놈은 비명을 삼킨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마지막 한 놈, 자전거 앞바퀴를 차 넘어뜨린 놈이 주먹을 움켜쥐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나 내가 노려보자, 곧 멈춰 섰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쓰러져 있는 패거리들을 둘러보고는 골목 끝을 향해 달아났다.
난 잠시 담벼락에 등을 기대 숨을 고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주먹이 조금 얼얼했고, 아까 주먹을 막았던 왼쪽팔뚝이 조금 욱신거렸다.
조금 숨을 가라앉히고서야 난 바닥에 주저앉아 배를 움켜잡고 씩씩대는 덩치에게 다가갔다.
내가 덩치 어깨에 오른팔을 걸치고 앉자, 덩치가 움찔하고는 상기된 얼굴을 일그러뜨리렸다.
그리고 내 눈을 피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난 덩치 귀에 입을 바짝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날 어떻게 밟아보겠다는 환상은 버리는 게 좋아. 다음에 또 이런 개수작 부리면 그땐 이정도로 안 끝나."
싸움을 더 이상 키우지 말자는 부탁이자 일종의 경고였다.
덩치는 숨만 헐떡일뿐 아무말이 없었다.
난 덩치 어깨를 툭 치며, 자리에 일어나 자전거에 올라탔다.
장편소설 '스페셜 미드나잇'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