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꿈 이루는 시간
'엄마 나 꿈 바뀌었어.'
'뭔데'
'배우가 될 거야'
'어 그래. 배우 멋지다'
하루에 한 번은 우리 모녀사이에 오가는 대화다. 올해 9살인 우리 딸은 되고 싶은 게 참 많다. 어느 날은 아이돌로 데뷔를 하고 싶고, 또 어떤 날은 헤어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가 어느 날은 파티시에가 돼서 맛있는 디저트를 만들고 싶다. 자기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고를 수가 없다고 얼른 어른이 돼서 다되고 싶다고 얘기하곤 한다.
이렇게 솔직하고 자신 있는 우리 딸이 가끔 신기하다. 나는 어릴 때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내 능력을 믿지 않았고 당당하게 내 꿈을 얘기해 본 적도 없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고 넌 뭐든 될 수 있다고 격려해 주는 사람도 없었던 거 같다. 애는 많고 사는 건 바빴던 부모님이었으니 이해는 하지만 아쉽다는 마음은 든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나의 오래된 꿈 중 하나다. 난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고 글 쓰는 것도 좋아했다. 집에 잔뜩 쌓여있던 전집을 읽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초등학생 때 학예회를 하면 직접 대본을 써서 친구들을 배우로 섭외해서 연극을 하기도 했다. 책을 사랑했고 글 쓰는 것도 좋아했지만 국문학이나 글 쓰는 직업을 가질만한 학과로의 진학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글 써서 먹고사는 게 가능할까 내가 그만큼 능력이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컴퓨터공학과로 진학을 했지만 그래도 대학시절에는 드라마공모에 작품을 내보기도 하고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조금은 갖고 있었다.
그러나 취업해서 일을 하고 결혼 후 아기까지 키우며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새 책 읽는 취미까지 사라진 내가 있었다. 심지어 아기가 어렸던 몇 년간은 책을 사놓고도 읽지를 못할 만큼 잠시도 여유가 없었다. 물리적인 시간도 없었지만 그것보다는 책을 펴고 나만의 시간을 보낼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게 더 컸다.
그러다 이렇게 덜컥 암이라는 인생의 암초를 만나다 보니 본의 아니게 평생 없었던 여유 넘치는 시간이라는 게 생겼다. 아프지 않았다면 나는 일을 절대 놓지 않았을 거다. 나름 내 일을 좋아했고 나이가 좀 더 들어도 할 수 있었으니 아마 할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했을 거다. 그런데 이렇게 강제실업 상태가 되고 마침 동네 가까운 곳에 도서관까지 생겨서 일주일에도 몇 권씩 보고 싶은 책을 실컷 보고 있다.
그러다가 몇 년간 생각만 하고 제대로 한편 끄적거리지도 못했던 브런치 작가도 도전해서 이렇게 미약하나마 즐겁게 글도 쓰고 있다.
살면서 암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좋아했던 일도 놓을 수밖에 없어서 앞뒤옆까지 길이 꽉 막혀 모든 게 망한 것 같은 때가 있었지만 그 순간을 견디다 보니 또 이렇게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아프지 않았다면 절대 갖지 못했을 시간이다. 계획대로 되는 건 없고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나도 모르지만 지금 이렇게 책 읽고 글 쓰는 지금 시간이 참 좋다. 그것만으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