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 등원전쟁
5~6세 여자아이라면 한 번은 걸린다는 공주님 병. TPO는 깡그리 무시한 채 오로지 공주님 드레스, 공주님 원피스, 한껏 투머치한 각종 장신구를 고집하며 자기만의 패션철학을 굽히지 않는 대쪽 같은 취향을 추구하는 그 공주님 병.
우리 딸기요정은 아무 생각 없이 나에게 몸을 맡기던 시절을 지나 옷을 입는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기 시작한 약 4세 무렵부터 초등학생이 되기 직전인 7세까지 꽉 채워 그 병을 앓았다.
나는 임신을 하기 전부터 남편에게 예쁜 딸을 낳아 공주처럼 기르고 싶다고 얘기했을 정도로 딸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우리 딸기요정이 그 로망을 아주 단단히 빈틈없이 이뤄주려고 했는지 4세 무렵부턴 일체의 바지거부, 핑크색 이외의 옷은 거부, 긴 원피스 고집, 투머치한 장신구 상시착용 등등의 공주님 병이 제대로 시작되었다.
사실 어릴 때는 마트 갈 때 드레스 좀 입혀주고, 식당 갈 때 공주왕관 좀 씌워주고 하면서 그저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이다 하고 대충 맞춰주면 되었다. 그런데 유치원을 가고 나니 상황이 달라졌다. 유치원에는 원복이 있었고 체육복이 있었다. 원복은 치마였지만 검정과 희색이 섞여있었고 체육복은 바지운동복이었다. 물론 저 두 가지 다 딸기요정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착장이었다. 정해진 요일에 정해진 원복과 체육복을 입어야 했지만 우리 딸기요정도 대쪽같이 늘 정해진 거절을 했다. 그래도 얼르고 달래고 혼내서 원복을 입히는 날은 그나마 낫다. 그런데 자유복을 입는 요일은 더 전쟁이다. 우리 딸기요정 지치지도 꺾이지도 않고 드레스를 고집했다. 내가 데리고 다닐 땐 드레스 얼마든지 입힐 수 있다. 이마트에 얼마나 많은 공주님들이 있는가. 그런데 유치원은 선생님이 많은 아이들을 케어해야 하는 공간이라 내 아이만 유난 떨며 봐달라고 하는 건 민폐였다. 심지어 화장실이 불편하니 긴치마는 자제해 달라는 선생님의 당부도 있었는데 저 치렁치렁한 드레스라니.
필사적으로 드레스만은 막고 싶어 하는 엄마와 공주님 병에 단단히 걸려 드레스가 아니면 입을 수 없다를 시전 하는 딸의 매일 같은 등원전쟁이었다. 그 전쟁에서 내가 승리하면 삐죽거리는 딸기요정을 세상 뿌듯하고 당당하게 유치원 버스에 태웠고 반대로 패배하는 날에는 공주님 드레스에 한껏 들뜬 행복한 딸기요정과는 달리 나는 그렇게 눈치가 보이고 선생님이 딸기요정 또 드레스 입었네라고 하실 때면 제가 입힌 거 아니에요 하고 변명이 하고 싶어 졌다.
심지어 발레복이 입고 싶어서 발레를 시작한 딸기요정은 밤낮으로 발레복을 입고 도르르 도는 자기 모습에 너무나 만족하면서 좋아했다. 같은 것을 계속 입을 수 없다며 발레복을 몇 개씩이나 사 대면서 시작했지만 다리 찢기가 너무 아프다며 난리를 피워서 결국 3개월 만에 발레를 그만두고 말았다. 그 후로도 발레는 하지 않지만 발레복만은 애지중지하며 종종 꺼내 입곤 했다.
한여름에 땀이 나도 긴 드레스를 포기하지 않고, 동네 산책만 가도 왕관을 장착하고 요술봉을 들고 나서는 우리 본투비 공주님의 드레스사랑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되었고 언제쯤 안 할 거야. 언제 끝나는 데하며 매일 싸우다 보니 어느덧 유치원 졸업까지 왔고 대망의 초등입학이 다가왔다.
시간이 갈수로 점점 긴장됐다. 이대로는 안되는데 다들 학교 가면 괜찮다는데 과연 공주님 병은 치유될 것인가. 입학해서 적응을 잘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공주님 병 치유라는 큰 퀘스트를 앞두고 있는 느낌이었다.
대망의 초등입학식이 끝나고 딸기요정도 어엿한 학생이 되었다. 그래도 학교와 유치원이 다르다는 낌새는 느꼈는지 등교 시 드레스는 시도하지 않았다. 정말 네가 눈치는 있어서 다행이다 했는데 그래도 원피스는 포기 못하는지 원피스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크나큰 발전이고 나는 너무너무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다 보니 딸기요정이 원피스마저 안 입겠다고 바지가 좋다고 하기에 이르렀다. 왜냐고 물으니 원피스 입고 오는 친구가 거의 없고 불편하다면서 바지를 달라고 했다. 드디어 기나긴 공주님 병과 안녕하는구나 감격스러웠다. 그 후로는 핑크만 고집하던 핑크병도 슬슬 사라져서 이제 파란 바지도 입고 빨간색 티셔츠도 입고 웬만한 옷은 사주는 대로 오케이 하는 데까지 오게 되었다. 이제는 원피스를 거의 입기 싫어해서 내가 오히려 좀 섭섭할 지경이다.
기나긴 공주님 병을 끝내고 다양한 옷을 입을 줄 아는 당당한 어린이가 된 우리 딸기요정. 옷장을 꽉 채웠던 드레스와 원피스는 동네에 새롭게 등장한 동생공주님에게 모두 물려주고 추억이 되었다.
공주님 병에 시달리는 공주님 어머님들. 걱정 마세요. 정말 초등학교 가면 나아집니다. 그때까지만 우리 잘 견뎌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