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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풀 Jul 02. 2021

엄마 이야기 2

엄니가 하는 말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라는 건 나의 착각일 뿐.

엄마는 한 번씩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말들을 하고는 한다.

잊어버리기엔 아까운 말들을 기록해본다.


1. 무궁화가 세 번 피고 지면 흰쌀밥을 묵어야.

엄마는 지독히도 가난했다. 그 시절을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송곳밥이 가장 먹기 힘든 밥이라고 말하곤 한다. 어쩌다 밥 이야기가 나오면 엄마는 종종 송곳밥이라고 말하며 그거는 못 묵을 밥이라고 말했다. 오죽 먹을 것이 없었으면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먹었을까? 소태라고 말할 정도로 쓴 게 분명한데 어린 날의 엄니는 얼마나 많이 굶주려야 했을까 싶어 마음이 짠해진다.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았을 거고 그래서인지 엄니는 여전히 식탐이 많은 편이다.

그러니 무궁화 꽃을 볼 때마다 '무궁화가 세 번 피고 지면 흰쌀밥을 묵는단다.'라고 말하며 밥을 연관 짓는다.

오래전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이제야 무궁화가 피고 지기를 반복하면 흰쌀밥을 먹는 계절이 온다는 것을 아는 그 옛날 어른들의 생활 속 지혜가 놀랍다고 느끼며 그걸 내게 말하는 엄니의 배고픈 지난날을 짐작해볼 뿐이다.

이걸 보고 듣고 자란 우리 엄니가 무궁화를 볼 때마다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나는 흰쌀밥을 고대했을 엄마가 함께 떠오른다.

이제는 적어도 굶지는 않으니까 얼마나 다행인가.


2. 한 뱃속에서 낳았어도 아롱이다롱이 해야.

'이건 돼야지가 자알 묵는디.'

깨작거리며 밥을 먹고 있는 내게 엄니가 말한다.

동생은 이 반찬을 해주면 돼지처럼 잘 먹는다고.

그러니 너도 좀 그래 보라는 은근한 재촉이다.

어디 가서 못 먹는다는 소리 안 들을 만큼 나름 잘 먹는데 동생의 먹성에는 못 미친가 보다.

'니그는 한 뱃속에서 낳았어도 다 아롱이다롱이 해야.'



3. 이게 흰쌀밥이었으면 좋것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눈을 좋아할까?

한 번도 엄니에게 물어보지 않았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눈인데도 엄마가 비를 좋아하는지 눈을 더 좋아하는지 왜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을까?

이제라도 엄마의 취향을 물어봐야겠다. 눈인지 비인지...

눈이 오면 엄마에게 눈을 보러 가자고 했다.

좁은 골목을 지나 너른 땅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보면 엄마는 꼭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게 다 흰쌀밥이었으면 좋것다.'

내게 눈은 그저 좋은 낭만인데...

세상 온통 하얗게 내린 저 눈을 보고 엄마는 쌀을 생각한다.

정말 저 눈이 쌀이라면 세상 어느 한 곳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더 많이 내리면 좋겠다.

새 하얀 저 눈이 흰 쌀이 되는 풍경을 잠시나마 상상해본다.

'엄니, 좋제라?'


4. 오메, 내 나무들 좀 보소.

가끔 생각해본다.

어딘가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건 엄니에게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잠깐 한눈을 팔면 어느새 다른 곳에 가 있는 엄마를 찾는 일이 잦은걸 보면 괜히 그럴 거라고 연관 짓곤 한다.

키 작은 몸으로 어디든 호기심에 둘러보며 걷는 모습을 이제는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보기는 어렵겠지만...

집에 있는 것을 유난히 심심해하는 엄마를 데리고 자주 밖으로 나갔다.

집 근처 호수며 여러 궁궐과 여행지들.

가능하면 엄마를 데리고 다양한 곳을 다녔다.

그중 산에 함께 들 때면 가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옛날에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장원이 아줌마를 내가 살렸어야. 나무하고 있는데 장원이 아줌마가 갑자기 하혈을 한당께. 그 길로 그 산을 단발질 치면서 내려와서 사람을 부르러 갔당게. 나무는 머리에 이고 뛰었제.'

예전엔 산에 솔갱이도 나무도 거의 없었다고 했다. 너도 나도 불을 때야 하니 모조리 긁어 가버리고 없었다고. 겨울철 땔감이 귀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꼭 저 이야기를 하셨다.

이제는 푹신하기까지 하는 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솔잎들을 밟으며 엄마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오메, 내 나무들 좀 보소.'



5. 첫눈 온다. 눈 묵어라.

고향집 큰 방에는 겨울이 온 방을 들썩이며 찾아왔다.

아랫목은 타들어가고 윗 공기는 시큰하다.

한지를 덧대 바른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쌩바람 부는 겨울을 나야 한다.

비틀어진 문 틈 사이로 한기가 몰아친다.

숟가락으로 방문을 걸어 잠그지 않으면 언제든 바람이 휙 문을 열어버린다.

그나마 그곳이 남쪽이라 덜 추었다는 것을 그곳을 떠나고 알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방문을 열면 마루와 마당이 보이고 멀리 산이 보였다.

뜨근한 아랫목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문을 열면 빼꼼히 내민 얼굴 위를 시린 공기가 나를 감쌌다.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나는 그런 겨울의 공기가 좋았다.

좀처럼 내리지 않는 남쪽의 눈이었지만 눈이 오는 날은 마냥 설렜다.

그건 아마도 엄마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엄마는 겨울 첫눈이 오면 항상 우리를 불렀다.

'첫눈 온다. 나와서 눈 묵어라.'

엄마의 그 말이 들리면 나는 문을 박차고 나와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혀 끝에 스치듯 다녀가는 첫눈.

오염 걱정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받아먹던 그 시절이 그립다.

엄마가 첫눈이라고 말하는 그 음성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엄니, 올 겨울에는 한번 더 내게 그렇게 말해주소.

'첫눈 온다. 눈 묵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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