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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 Apr 06. 2021

15.우리 집 남자는 이상한 여자와 산다

오늘도 나 좀 이상했나?

다시 떠나자(Rome, 2017)


  오늘은 나와 같이 사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를 안지가 벌써 햇수로 18년에 접어들었다. 오래도 되었구나. 그의 나이 열아홉, 청소년의 데드라인을 넘기기 직전에 그를 처음 보았다. 만났다가 아니라 보았다. 아주 맨 처음 그를 보았을 때가 어제같이 기억난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대형 마트에 새로운 알바가 들어왔다고 했고, 멀리서 뚱하게 걸어오는 저 아이인가 보다 했다. 처음 뚱했던 표정과 달리 싹싹한 구석이 있었고 함께 일하는 누나들과 곧잘 어울리며 사랑을 듬뿍 받았다. 늦은 시간 알바를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 맥줏집에서 늦도록 떠들며 그렇게 인연이 이어졌다.      



  갓 스물이 된 그는 세 살이 어렸지만 어린애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때의 내가, 나의 친구들이 어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다니던 대학교를 한 학기 만에 관두고 입대를 했다. 그 후로 팍팍한 20대의 삶이 펼쳐졌다. 각자의 삶을 살아내느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꼭 함께 했다. 자랑하고 싶은 애인이 생겼을 때라든지, 애인이랑 헤어져서 술친구가 필요할 때라든지, 돈이 급해서 빌려야 할 때라든지, 공짜 콘서트 표가 생겼을 때라든지 하는 그런 순간들. 또 술에 취해서든 맨 정신에서든 나름 진지하고 깊은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어느 순간 서로에게 ‘소울 메이트’라는 오글거리지만 그 당시로는 적절했던 그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꽤 많은 스토리를 공유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의 연인에게 불쾌한 존재가 되기도 했다.      



  엄마가 암에 걸리고, 내가 일을 그만두고, 만나던 남자 친구와도 헤어지고, 엄마의 병세가 짙어지던 무렵 그를 오랜만에 만났다. 엄마의 소식과 나의 소식을 전했고 그는 왜 이제야 소식을 전하냐며 타박을 했다. 엄마의 병이 깊어질수록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엄마는 아빠 옆에서 잠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것에 빨려 들어갔고 나는 혼자 멍하니, 방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즈음 나는 많이 힘들었고, 외로웠고, 두려웠다. 그 빈 시간들을 그가 많이 채워줬다. 밤에 만나 치맥도 하고,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엄마를 보낼 때도 제일 먼저 찾아와 주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곁에 남아있었다. 엄마를 보낸 후 흘러넘치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을 때도 그가 제일 가까이에 있었다. 엄마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그가 연애를 해보자는 말을 하기 전까지도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는 정말 불현듯, 그러자 하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10년 가까운 세월을 친구로 보내고 1년이 조금 넘는 연애를 하고 우린 부부가 되었다. 곧이어 1호가 태어났고 각자 남편과 아내, 엄마와 아빠, 며느리와 사위, 딸과 아들의 역할들을 해나가느라 삶이 바빠졌다. 친정에서 시댁으로 이어진 더부살이를 끝내고 우리들만의 집으로 이사도 했다. 그 사이 2호도 태어났다. 그렇게 벌써 결혼 7년 차가 되었다.      



  이 사람과 결혼하기를 참 잘했다 생각할 때가 많다. 엄마는 20대에 접어들어 연애를 하고 있던 나에게 남자에게 모든 것을 드러내 보여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가끔 했다. 그때는 뭘 보이지 말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고, 연인이라는 관계가 아름답고 좋기도 했지만 온전하지 못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좀 다르다. 오랜 시간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공유해왔기에 적당히 가릴 것도, 꾸밀 것도 없었다. 그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온전한 나로서 그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이 한결 가볍고 포근했다.     

   


  나는 예민하고 걱정이 많고 잡생각이 많은 반면 그는 전혀 안 예민하고, 걱정을 사서 하는 법이 없고, 잡생각보다 중요한 생각들만 주로 하고 산다. 그는 나를 보고 참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상한 여자라고도 말한다. 왠지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기분 나쁘지가 않다. 나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자의 유쾌한 진단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나를 그저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바라봐주는 것이 안도가 된다. 내가 하고 있는 소소한 걱정이나 상념들을 아주 무겁게 털어놓았을 때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거참 이상한 여자네.”      



  이상한 이유야 있겠지만 뭐가 이상하냐, 왜 이상하냐 따져 묻지 않는다. 그저 그 말 한마디에 나의 잡스러운 걱정들은 그 무게를 덜고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나는 ‘오늘도 나 좀 이상했냐’며 덩달아 웃고 만다. 연애와 결혼 생활을 통틀어서 그와 투닥거리며 싸워본 적이 없다. 늘 일방적으로 내가 화를 내고, 또 화를 내고 짜증을 내지만 그는 함께 대거리를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 속을 알 수 없어 내 속이 더 답답했지만 지금은 괜찮다. 그가 왜 그러고 있는지 아니까 괜찮다. 철없는 아이의 짜증을 바라보는 아빠의 마음이 아닐까 한다.      



  즐겨보는 육아 프로그램에서 두 아들 녀석에게 하루 종일 시달리다가 퇴근한 남편을 보자 아내가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나왔다. 마치 넘어진 아이가 엄마를 보자 더 서러운 마음에 엉엉 울어버리는 그런 모양이었다. 그 아내에게 남편은 마음의 닻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항구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내게도 남편은 그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내 마음의 안식처였던 엄마를 보내고, 마음 주머니를 내려놓을 곳이 없어 늘 그 주머니를 들고 서성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을 키우고 또 함께 어디론가 떠나면서 점점 남편에게 마음 주머니를 내려놓는 순간이 많아지고 있다. 때론 묵직하고, 때론 송곳이라도 들어있는 것처럼 뾰족하고, 또 때론 한없이 가벼운 그 주머니를 남편은 잘 들어주고 있다. 앞으로도 잘 받아 주리라 믿는다. 항상 감사하다. 저녁에 삼겹살이라도 구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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