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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 Jan 24. 2021

2. 마음먹기

앉은자리를 고쳐 앉아 보자.

2020년 생일맞이 등산, 장산 꼭대기에서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아이들과 부대끼며 하기 힘들었던 일들을 처리한다. 읽고 싶었던 책을 읽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한다. 그러면 시계는 금방 11시를 넘긴다. 배가 조금 고프다. 야식을 먹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지만 이내 뭔가를 부스럭부스럭 찾는다. 딱히 먹고 싶은 건 없다. 냉장고, 싱크대 선반, 베란다 문을 열어보지만 별건 없다. 결국 시리얼을 우유에 말아먹거나 나의 최애 간식 팔도 비빔면을 만들어 먹는다. 가끔 밥이나 빵을 먹기도 하고,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이런 생활을 한지 어느덧 1년이 훌쩍 넘었다. 올 것이 왔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속이 쓰리더니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속 쓰림이 찾아온다. 야식을 피하기 위해 애들이랑 일찍 잠드는 건 왠지 좀 억울하다. 앞으로도 계속 늦게 잘 거니까 속에 부담을 덜 주면서 씹는 맛도 있는 뭔가가 없을까 멍하니 생각하다가 하얀 백설기가 생각났다.      


  울산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다. 삼시 세끼를 목숨같이 지켜온 나로서는 끼니를 챙기는 것이 말 그대로 '일'이었다. 아침에 간편히 먹으려고 백설기를 한 되 했다.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다가 아침에 전자레인지에 돌려 뉴스를 보며 우유 한 잔이랑 먹었다. 처음 직장생활을 하며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제 취직했으니 결혼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남자 친구와도 헤어졌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차였다. 식욕이 바닥을 쳤고 인생 최저 몸무게를 찍었다. 덕분에 한창 유행이던 스키니진을 입고 새다리를 뽐낼 찬스를 얻기도 했다. 그건 그거고 아침에 그 손바닥만 한 백설기 한 장이 버거웠다. 반쪽 겨우 먹고 출근했다가 집에 돌아와 남은 반쪽을 저녁으로 먹었다. 6개월쯤 지나 생활이 익숙해지고 만나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시 입맛이 돌았다. 반쪽도 부담스럽던 백설기가 한 장으로 부족해졌다. 입 속에서 까끌거리기만 하던 녀석이 언제 이렇게 달콤하게 변한 것일까. 전자레인지에 너무 돌려 한쪽 귀퉁이가 말라붙어 있어도, 바닥이 짓물러져 흐물흐물해져 있어도 맛있었다. 백설기는 그냥 백설기다. 변하긴 뭐가 변했겠나. 내가 변했지.      

 

 20대 중반까지 나에게 식욕이란 언제나 넘쳐나는 그런 것이었다. 다행히 대학생 때 혹독한 알바를 경험하면서 살이 빠졌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그 넘쳐나는 식욕을 주체하지 못해 1년 365일 다이어트를 해야 할 몸이었다. 좋으면 좋으니까 먹어야 하고, 힘들고 스트레스받으면 힘드니까 먹어야 했다. 스트레스랑 입맛과의 상관관계 따위 중요하지 않은 삶이었다. 그런 내가 변했다. 지금 나에게 식욕은 정말 정확한 바로미터다. 약간만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입맛이 뚝 떨어진다. 뭘 먹어도 맛있는 것이 없다. 다 그 맛이 그 맛이고 내가 다 아는 맛이다. 더 이상 맛이 나의 식욕을 자극하지는 못한다. 그저 배가 고프고 에너지가 달리고 힘이 없으니까 먹는 거다. 알뜰살뜰히 챙겨 먹지 않아도 손톱만 한 알약 하나 입에 탁 털어 넣으면 포만감이 생기고 에너지가 도는 그런 것은 왜 없는지 알 수가 없다.


  세상 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마음을 어찌어찌 잘 먹어보려 한다. 어떤 때는 백설기 한 장보다 그 마음먹기가 더 고되다. 쓸데없는 일로 골머리를 썩으며 입맛이 없다고 하는 나에게 남편은 그런 잡스런 생각이나 걱정을 떨치라고 한다. 그럼 나는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어떻게 하면 툭툭 떨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좀 알려달라고 울부짖는다. 누구나 다 말로 할 수 있는 정답 말고 진짜 할 수 있는 ‘액션’을 가르쳐달라고 하지만 소용없다. 남편은 가르쳐줄 수 없다. 나만큼 걱정 쟁이가 아니고 나만큼 입맛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서 어떻게 하면 쓸데없는 상념을 떨칠 수 있을까 여러 날 고민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남편이 이 글을 본다면 배신감을 약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 액션을 나는 안다. 먹기 힘든 마음 억지로 먹으려 하지 말고 앉은자리를 고쳐 앉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안다.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을 간다. 옷을 차려 입고 서점에 간다. 내 허벅지살과 뱃살을 쫀쫀하게 숨겨주는 레깅스를 입고 강변에 운동을 하러 간다. 도시락을 싸들고 등산을 간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가서 책을 읽는다. 서랍을 다 열어젖히고 옷장을 정리한다. 도서관에 가서 수학 문제집을 푼다. 설명서를 보고 레고를 만진다. 끼적끼적 글을 쓴다…. 고쳐 앉을 수 있는 자세가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오늘은 두 녀석 모두 제각기 가야 할 곳으로 갔다. 얼마든지 자리를 고쳐 앉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백설기를 생각하니 입에 침이 좀 고이는 것이 먹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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