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불러야 할까. 친구에게 생각 없이 하는 말이었다면 군인 ‘애기’라고 했을 테다. 아이들을 어린이집, 유치원 차례로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 횡단보도 앞에 국방색 군복에 베레모 눌러쓰고 묵직한 가방까지 둘러 맨 군인이 서 있다. 스치듯 지나가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빳빳하게 서 있는 자세로 보아 신병 딱지를 막 뗀 정도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리고 군인은 왜 ‘군인’일 수만은 없는 것인가 생각해 본다.
유치원, 국민학교 다닐 때에는 국군의 날이면 군인 ‘아저씨’께 편지를 썼다. 아직 반공의 구호가 남아있던 시절 내 상상 속의 군인 아저씨는 애국가 영상에 빠짐없이 등장하듯 눈 덮인 38선 부근을 철통같이 수비하며 국가를 수호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집 근처에 있던 엄청나게 크고 담벼락에 철책이 둘러쳐져 있는 국군 병원을 보면서 국가를 지키는 일이란 저렇게 큰 병원에 가야 할 정도로 험하고 엄중한 일이구나 했다.
군인 아저씨를 지나 얼마지않아 군인 ‘오빠’가 되었다.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으로 갔던 통일 전망대에서 우리가 탔던 버스 안으로 군인 오빠들이 몇몇 올라와 주소며 이름들이 적힌 종이를 나눠주고 갔다. 아무 말도 없이 엄숙함마저 감돌 정도로 진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결론은 위문편지 좀 보내라는 것이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와 몇몇 친구는 정말로 편지를 보냈다. 마음이 따뜻했던 건지 군인 오빠와의 어떤 로맨스를 꿈꾸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와중에 나는 친구들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군인들 발 꼬랑내 완전 끝장이다!”
서울에 사는 사촌 오빠가 군대를 갔다. 수방사라는, 수도 머시기라는 곳에서 복무 중이라 했다. 어느 여름 휴가를 맞아 부산에 놀러를 왔는데 민간인은 절대 알 수 없는 어떤 자부심이 있었나 보다. 그 먼거리를 군복에 군화까지 다 갖추고 왔다. 그리고 지독한 발 꼬랑내도 함께 왔다. 아, 서울말 쓰며 다정하고 지적이던 이 오빠가 어떻게 이렇게 된 거지… 충격이었다. 군대라는 곳이 이런 곳이구나. 오빠에게 말은 못 했지만 군인에 대한 잊지 못할 강렬한 기억과 냄새를 남겼다.
강렬했던 순간을 지나 대학생이 되었을 때 군인 ‘친구’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누구는 어디로 갔다더라, 언제 백일 휴가를 나온다더라, 누구는 RT를 간다더라, 걔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등등. 수업까지 째고 동기 녀석의 입대를 배웅하러 간 적이 있었다. 친구의 가족과 함께 부대 앞에서 자장면으로 마지막 식사를 했다. 당시 나는 군부대가 시내버스 한 번만 타도 갈 수 있는 곳에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38선 언저리가 아닌 그곳은 군대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입대하는 친구보다 내 눈앞에 있는 탕수육에 더 마음이 갔다. 우리는 다 같이 웃으며, 그 친구의 심정 따위 관심도 없이 내일 다시 만날 듯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아이들과 그 군부대 옆에 있는 산에 자주 놀러 간다. 갈 때마다 그날이, 그 친구가 생각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이제는 군인 ‘동생’들이 더 많아졌다. 그 동생들을 보면서 군인이라 해봐야 대부분 20대 초반인데 왜 아이들에게 군인 ‘아저씨’라 부르게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휴가 나온 동생들을 보며 제대 언제 하냐, 그날이 오기는 오냐 하면서 듣는 사람은 하나도 재미없는 농담들을 해댔다. 학교를 졸업하고 주위에 군인보다 예비군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 나도 이제 더 이상 어리지 않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제는 내 주위에 예비군도 보기 어렵고 동네 수호자들이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굳이 따지자면 군인 ‘조카’쯤이 되지 않을까. 조카뻘 되는 아이들의 군 입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며칠 전 한 국회의원이 2030년을 목표로 완전 모병제를 국방 공략으로 내세웠다. 만약 종전 선언이 이루어진다면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닌 듯싶다. 1호가 가끔 모든 남자들은 군대에 가야 하냐고 묻는다. 우리나라는 현재 그런 상황이라고 말하면 자기는 가기 싫다고 한다.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너무 걱정 말라며 달래고 있으면 옆에서 해병 978기 남편은 남자라면 해병대에 가야지 하고 몹쓸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아이가 심란한 마음에 밥을 깨작거리고 있으면 이래가지고 극기주(안 먹고 안 자는 훈련)를 어떻게 견디겠냐며 또 몹쓸 미소를 짓는다. 오늘부터 극기주 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 입을 다물어야 할 텐데 눈치가 없다.
오빠가 입대할 때 오열하며 거의 쓰러지던 엄마가 생각난다. 나도 입대하기 전날까지만 해도 얼른 좀 가라, 하며 깐족거렸지만 막상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정말로 소리 내어 엉엉 울어버렸다. 내 아들이 군대를 가는 생각을 해본다. 오빠가 군대에 갈 때보다 마음이 더 좋지 않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이지만, 이기적이게도 그런 순간은 영원히 닥쳐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군인 조카까지인가 보다. 군인 ‘아들’은 그리 반가운 단어가 아닌 것을 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