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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남 May 05. 2020

내가 듣고 싶은 말

창작소설 #01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위층의 남녀, 그들의 의지 때문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밤마다 구역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일어나는 거칠고 험한 곳이었다. 밤마다 삼촌을 따라나서서 도둑질을 배웠고 우리 구역을 넘보는 녀석들을 혼내줘야 했다. 밤새도록 생존 투쟁을 하며 돌아다니면서도 주린 배를 안고 이루지 못하는 잠을 청해야 했다. 그 험난하고 궁핍한 시절에 이 남녀는 내게 필요한 음식을 주고 친절과 온정을 베풀었다. 하지만 삼촌은 그들을 경계하라고 내게 일러주었다. “시절이 흉흉하다. 친절을 베풀다가 강탈하는 녀석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어. 낮에 활동하는 그들과 상관하지 마라.” 나는 삼촌의 말이라면 거역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따뜻함 또한 거부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치 나를 버리고 떠난 엄마의 자리로 들어오려 하는 것 같았다. 찬바람이 매서운 칼바람이 되는 초겨울, 배고픈 나는 그들에게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는데 그때 ‘사건’이 일어났다. 그들의 친절함은 갑자기 폭력으로 돌변했고 나는 완전히 제압당했다. 나는 기절했다. 


깨어났을 때는 이 집이었다. 그리고 내 신체에서 알 수 없는 변화가 느껴졌다. 내 몸에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나를 만지려고 했는데 마치 겁탈을 당하는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움에 떨었고 배신감을 느꼈으며 할 수 있는 만큼 저항했다. 그들은 이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아래층에 머물면서 그들이 움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집안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그들이 외출하는 소리는 내가 자유로워지는 신호였다. 한동안 그렇게 지냈고 그들은 이런 나를 내버려 두었다. 그들은 더는 폭력적이지 않은 듯 했다. 예전처럼 따뜻한 태도로 내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려했다. 그리고 내가 귀 기울이는 그 소리를 이용해 나를 배려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는 ‘식사 시간’을 알리는 것이었고, ‘철커덕’하는 소리는 ‘외출을 하겠으니 자유롭게 돌아다니시오.’라는 뜻이었다. 시간이 흘렀고 많은 소리의 신호가 생기고 체계가 되었다. 그 신호는 나만 듣고 몰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나의 행동을 예측해 소리를 이용했으므로 그것은 ‘언어’라고 할 만했다. 


우리의 ‘언어’는 내게 패턴화된 생활을 가능케 했다. 이 패턴은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었고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내가 배고픈 시간에 어김없이 그들이 음식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배불리 먹을 수 있다니! 주린 배를 안고 도둑질을 위해 밤새도록 돌아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안도감에 휩싸인다. 만약 지금 내 구역의 형제들을 다시 만난다면 나는 이 풍족한 삶 때문에 죄책감마저 느끼게 되리라. 양식의 풍족함과 단순한 일상은 남녀의 돌발행동이라는 위험 부담을 안고 있지만 나는 분명 큰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는 내 폐쇄적인 생활이 감옥 같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열린 세상보다, 안정감이 있는 닫힌 세상이 훨씬 행복한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생존을 위해 다투지 않는 생활은 존재를 사색에 잠기게 하고 정서를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내 천성이 싸우고, 이기고, 획득하는 것에 있지 않고 고요하게 명상하고, 사색하고, 무언가를 깨닫는 것에 있다는 것을 이곳에 온 뒤 알게 되었다.


1년간의 안정적인 삶을 누린 후 깨닫게 된 내 행복의 결정적인 이유는 어쩌면 과거의 불행과 ‘사건’의 충격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감정은 현재 자신의 상황과 과거의 비교에 의해 생겨난다. 과거의 처절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안정을 이해하고 감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와 완전히 분리되어 멀어졌고 이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뾰족했던 경계심도 이들의 온정에 의해 다 녹아내렸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나를 납치한 이들과 화해하고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며칠 전부터 고민해왔던 말을 오늘 그들에게 하고 싶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평생을 함께하자는 고백을 말이다. 수줍지만 누워서 배를 보이며 이렇게 말할 작정이다. “야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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