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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남 May 05. 2020

나사의 회전

높은 위계를 만든 사회


욕망이 뒤섞이는 사회에서는 권력자들의 욕망이 우선시 된다. 소수 권력자의 욕망은 법으로 구체화 되고, 사회의 덕목들로 자리 잡는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은 기독교 기반의 사회다. 기독교의 유일신 야훼는 아버지의 형상으로 표현되며 예수는 성적으로 순결했던 여성에게 잉태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여성에게 순결을 강조하고 그것을 어기는 여성을 문란한 죄인으로 낙인찍는다. 이 사회에는 여성을 도구화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남성의 욕망이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 소설의 여교사는 목사관이라는 환경에서 보수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인물로, 그만큼 성적으로 크게 억압받았음을 예상할 수 있다. 선과 악의 도덕률이 강력하게 지배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성향은 중요하지 않으며, 여성의 경우 더욱더 그러하다. 사회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가치가 자신의 성향과 부합할 경우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렇지 않은 성향은 무의식 속에서 억압하는 것이다. 그렇게 억압된 욕망은 공격적으로 드러나서 범죄로 이어지거나,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여 더욱 억압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자신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성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개성화를 이루지 못하고, '숙녀'와 '신사'라는 이름의 획일화를 강요하는 것이다. 획일화된 사회는 계급화되고 수직으로 높은 위계질서를 만든다. 개인의 개성에 따른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급에 맞는 역할을 주고, 그 사회 시스템의 부속품으로서 순응하며 살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블라이 저택의 사건은 이런 사회의 문제점을 상징화하고 있다. 여교사는 현실적인 연애 감각이 없어 보이며, 사실상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거나 저택을 운영할 만한 능력은 갖고 있지 않다. 그런 그녀가 저택의 여교사로 부임하게 된 까닭은 고용주의 무책임한 태도와 그녀가 그에게 느낀 감정 때문이다. 이 감정은 남녀가 동등한 입장에서 나누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람을 떨림과 앙망함으로 대하는 종교적인 사랑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이런 감정을 건강하게 처리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무의식 속에 억눌린 욕망을 유령의 형태로 투사한다. 강박적으로 아이들을 못살게 구는 것이다. 사실 소설은 여교사가 아이들을 매우 아름답게 보고 있으며 아이들 또한 자신을 매우 잘 따른다고 묘사하고 있으나, 이것은 여교사가 작성한 1인칭 시점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는 설정으로 여교사의 말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두 아이와 그로스 부인 중 유령을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 그 증거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과 지켜야할 도덕률 그리고 고용주를 보고 싶다는 갈망으로 뒤틀린 욕망을 현실화 하기 위해 아이들과 그로스 부인을 이용한다. 


사실 그녀는 처음에 블라이 저택에서 자신이 목사관 생활에서 누리지 못한 안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녀는 여름의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과 즐거움, 아이들과 음악, 친절한 하인들 속에서 그녀가 이전에는 배우지 못했던 것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인간에게 이런 환경은 정서에 매우 이롭다. 높은 곳을 차지하려는 야망이나 남과 비교하는 허영이 없다면 그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만족감일 것이다. 그런데 여교사는 이런 만족감을 매우 경계하는 태도를 보인다. 자신의 경계가 완전히 풀어졌음을 인식하고 정서의 나사를 조여버리는 것이다.


그로스 부인은 전형적으로 사회에 순응하는 인물이다. 저택의 하인을 통솔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있지만, 지위에 순응하는 태도를 취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윗사람을 무작정 믿는 믿음으로 미숙한 여교사에게 복종하기를 원한다. 보이지도 않는 유령을 이야기하는 여교사의 말을 구체적으로 완성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마치 점쟁이들이나, 영매들이 만드는 상황을 보는 것 같다. 점쟁이들이 고객들에게 반말을 하고 위계질서를 만들어 심리적 구속상태를 형성한 후, 포괄적인 말을 고객에게 하여 자기 일인 양 믿게 만드는 수법 같은 것 말이다. 


아이들은 이 시대의 가장 큰 희생양으로서 순수함을 상징한다. 소설에서 아이들의 예술성이나 창의력은 여교사를 놀라게 한다. 보수적인 교육으로 자란 여교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자유롭고 유연한 상상을 하는 아이들이 사회의 틀에 꽉 들어맞도록 강요받는 느낌을 받는다. 결국 이 사회는 소수의 권력자들을 위해 절대적 다수가 희생당하는 사회다.


절대적인 세계관을 상정하고 그 위에 블록을 쌓아 올려 높은 위계를 만든 사회는 이처럼 위태롭다. 우리는 절대적인 믿음이 아니라 작은 사실들을 모아 커다란 구조물을 만들 듯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 여기에는 각 개인의 이성적 판단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갈등, 동성애, 낙태 합법화, 남녀차별 등의 수많은 사회문제는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감정에 치우친 생각, 억눌린 욕망, 무조건적인 믿음은 블라이 저택의 유령처럼 혼란을 일으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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