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다. 얼마 안 가 잠잠해질 줄 알았던 상황은 예상과 달리 길고 고단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미 지난달부터 여행객들은 대폭 줄었고, 슬슬유채꽃 관광이 시작되어야 할 제주는 한산하기 그지없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월정리도 예외가 되지는 못하나 보다. 바다는 여전히 이렇게파랗고 아름다운데.
휴일인 오늘 아침에 눈을 뜨니 제주에 확진자가 한 명 더 늘었다는 문자메시지가 와 있다. 차로 한두 시간이면 끝에서 끝을 오갈 수 있는 제주. 공포는 동네 주민들의 채팅방에서 체감된다. 자영업자들은 푹 꺾인 매출에 지치다 못해 예민해졌고, 지난주까지만 해도 먼 얘기 같던 마스크 전쟁은 시골 우체국과 마트 앞에서도 현실이 되었다.
청소와 빨래를 하고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며 오전 내내 고민하던 끝에 결국 일주일 동안 가게를 닫기로 마음을 정했다. 불특정한 사람들이 오가는 식당이라는 공간이 바이러스 확산의 거점이 되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고, 판매량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식재료와 음식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가게에 나가 남은 재료들을 단도리하고, 집에 가져올 것들과 나눔할 것들을 구분해서 포장을 했다. 청소를 하고, 전기와 가스를 한 번 더 점검한 뒤, 임시휴무 안내를 써서 붙였다.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마트에 갔다.비장한 마음으로 메모를 꼼꼼히 살피며 카트에 식량을 챙겨 담았다. 김, 달걀, 우유, 두부, 요거트, 냉동만두, 사과와 토마토, 아보카도, 샐러드 채소, 유부초밥 키트, 후리가케, 그리고 맥주와 와인까지.
그리고 그 와중에 유채잎까지 한 봉지 집어 들었다. 다소 울적해진 마음을 봄나물로라도 달래야 할 것 같았달까.
집에 돌아와 겉절이를 만들려고 유채잎을 씻어 물기를 빼놓고 나니 아뿔싸, 볶은 참깨가 떨어졌다. 퇴근 후에 집에서는 대개 간단하게 요기만 하다 보니 식재료나 양념에 맥이 종종 끊긴다.
어쩔 수 없다.
모든 것을 중단하고 냉동실을 열어 얼려둔 참깨를 꺼낸다.물에 씻어서 체에 밭쳐내길 반복하면서 불순물을 걸러내고, 그새 물을 머금어 통통해진 깨를 팬에 쏟아붓는다.
이제부터는 센 불에서 참을성 있게 주걱으로 저어주며 수분을 날려줘야 한다. 그러다 보면 탁탁 소리와 함께 깨가 조금씩 튀어 오르기 시작한다.
불을 줄이고, 색을 봐가며, 타지 않되 바슬바슬하게, 그렇게 볶는다. 어느새 온 집에 '깨 볶는 냄새'가 가득하다. 불을 끄고, 공기청정기를 틀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작한다.
뜨거운 김이 다 빠져나가면, 절구를 준비한다. 조금씩 덜어 절구에 깨를 짓이긴 뒤에, 다시 팩에 나누어 담아 보관한다.
요리를 하다 보면, 밑재료들을 준비해두는 것은 귀찮고 지루한 일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마늘을 적당량씩 다져두는 것이나, 대파를 손질해서 꺼내 쓰기 좋게 냉장고에 정리해 두는 것이나, 이렇게 깨를 볶아놓는 것 같은 일 말이다.
다진 마늘과 볶은 참깨를 준비해놓고서야, 한참만에 다시 겉절이 모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갓 볶은 깨는 더 고소하고 포슬거렸다. 양파를 채 썰고, 액젓과 고춧가루에 참기름을 더해 쓱쓱 버무려 유채 겉절이를 만들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된 휴가.
그 첫날의 점심은 그렇게 늦어졌고, 나는 혼자 사는 연예인들의 하루를 티비로 구경하며 오랜만에 아주 천천히 밥을 먹었다.
사소해 보이고 그래서 대개 귀찮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것들이 일상을 지탱한다. 운동. 독서. 이중세안.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잠드는 것. 건강한 식사. 영양제와 비타민 챙겨 먹기. 특히 요즘은 꼼꼼한 손 씻기.
그리고 오늘은 참깨 볶기.
그러니까, 나는 나의 일상이 깨지지 않도록 내일도 일찍 일어날 것이고 운동도 할 것이다. 외부의 물리적 상황이 나를 잡아먹지 못하게, 몸도 마음도 다치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