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걸 꿈꿔왔던 나는 역시나 결혼 생각을 버릴 수 없었고, 다시 부모님과 맞서야했다. 같이 부모님을 설득할 방법을 궁리했다. 나혼자. 그리고 내 옆에서 그는 점점 자신감을 잃었더랬다. 나의 부모님에 대한 그의 원망과 적대심은 날로 커져갔고 그런 그의 마음은 만날때마다 삐죽삐죽 그의 입과 표정에서 삐져나왔다. 이런 날들이 많아질수록 내가 지금까지 지켜온 사랑와 자존심, 부모님과 맞서던 그 힘이 되었던 단단한 무언가가 서서히 무너져갔다. 이 위기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기대했지만 내 마음만큼 그는 굳세지 못했다.
'나 지금까지 뭐한거지...'
그런데 나와 한몸 같았던 그였기에 영원한 헤어짐을 결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가 우리 부모님을 비난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여지도 주지 않는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울면서도 단단하게 잘라냈다. 내 사지가 잘려나가는 고통이었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는다는 생각으로 해냈고 버텼다.
나는 원래 미련이란게 별로 없는 사람이라 물건도 사람도 한번 뒤돌아서면 끝인데 그런 편치고는 함께 한 시간의 깊이만큼 울고 아파했다.
오랜시간 한 사람과의 연애를 이어왔던 나에게 연애 FA시장은 너무나 흥미로운 세상이었다. 부모님의 소개로도, 친구의 소개로도, 또 신문물이었던 데이팅앱으로도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면서 실망도 하고 새로운 기대에 부풀기도 하며 외롭지만 자유로운 싱글 라이프를 즐겼다.
그러다 더운 여름날, 피자와 파스타를 파는 어느 식당에서 이 남자를 만났다.
나는 마르게리따 피자를 정말 좋아하는데, 상대를 배려한답시고 드시고 싶으신 게 있냐 물으니 그 남자는 되물어주는 대신 미리 메뉴를 결정해둔 사람마냥 고르곤졸라와 파스타 하나를 잽싸게 주문했다.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서로의 눈만 열심히 탐색하며 그 아래 생김새를 추리하다가 음식이 나오자 떨리는 마음으로 마스크를 내렸다. 혹시나 상대가 실망하지 않을까 마스크를 벗는 일이 뭔가 부끄럽고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표정을 살피니 예상한 생김새와 비슷했나보다.
그와 얘기를 나누다 나와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걸 알게되었다. 나이 차이로 인해 학교에서 마주친적은 없지만 공통점이 하나 생기니 순식간에 거리감이 좁혀지고 마음이 편해졌다.
조금 선선한 여름 밤에 식당 근처 벤치에 앉아 오랜시간 이야기를 했는데, 대부분의 이야기는 부동산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디에 자기가 집을 사려고 알아보고 있다는 이야기, 직장생활하며 돈을 잘 모으는 사람의 사례, 그 반대의 사례, 어디가 어떻게 개발될거며 너도 열심히 집을 사라는 이야기.
다른 여자였다면 이미 집에 가겠다고 자리를 박차 일어났을텐데, 그 전 남자친구에게서는 듣지못했던 이런 이야기들이 나에겐 너무 신선했다. 선선한 공기, 시끄러운 도로에서 조금 떨어져 조용하고 어둡지만 광고 간판들 조명이 아득하게 빛을 비추던 그 공간이 내 기분을 좋게 했고, 미래를 위해 선배가 후배에게 조언해주는 그 경험이 생경하기도 하지만 '아, 이 나이의 남자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기도 하는구나.' 싶어 잔소리 같기도 한 그의 말들이 나쁘지 않았다.
전 남자친구는 내가 나중에 결혼해서 어디 살면 좋겠다 얘기하면 그저 같이 뜬구름잡는 소리를 하기만 했다. 그나 나나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소망만 늘어놓다가 항상 그렇게 현실적인 이야기들은 허공에 날려보냈다. 어쩔수없이 이 직전의 경험과 비교를 하게 되니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이 남자가 좋게 보였나보다.
그렇게 이 남자와 식당과 카페, 한강 정도만을 오가는 코로나 시기 연애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