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나는 쿵짝이 잘 맞는 만큼 모든 부분에서 스파크가 더 크게 일었다. 싸움도 열정적으로 하고, 화해도 엉엉 울면서하고. 또 사랑도, 표현도 그만큼 뜨거웠다.
서로에게 서로가 자식이 되기도 하고, 베프가 되기도 하고, 세상 하나밖에 없는 연인이 되기도 하며 우리의 미래를 그리기 시작했다. 결혼하고 집을 구하고, 집은 후지겠지만 아기자기하게 예쁘게 꾸미고, 임신을 위해 노력하고, 아기를 낳아 키우고, 나이들어 흰머리가 가득하고 쭈그렁방탱이가 되어도 지금처럼 장난치고 아끼고 사랑하는 아주 행복한 상상을 함께 나눴다.
미래를 함께 하고픈 열망이 커질 수록 머리 위에 떠있던 먹구름도 커져갔다.
우리 부모님의 반대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을 돕고 있었고, 나의 아버지는 대기업 임원이셨는데,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그 작디작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딸의 부모들은 모두 그러할테지만, 나의 부모 역시 결혼 후에 딸이 혹시나 고생할까봐 사윗감의 비전과 능력을 중요시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내가 돈을 아주 잘 버는 상황이라면 또 달랐겠지만-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이고 그 현실에서는 돈을 무시할 수 없는 일인것을. 그때의 내 머릿속에는 사랑만이 가득차서 그렇게 세속적인 것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반대하는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으면서 그 사람을 계속 만났고, 부모님과 나는 멀어져갔다.
한참 후에 엄마에게서 들으니 그때 딸에게서 상처받은 아버지가 밤에 많이 우셨단다. 그 단단하고 크나 큰 산 같은 아버지가... 착한 딸 콤플렉스라고 이야기하고 다닐만큼 착한딸인줄 알았던 내 자신은, 지금와서 돌아보면 어렸을때는 착하고 자랑스런 딸이었다가 성인이 된 후부터는 부모의 아픈손가락이었다.
부모님의 반대로 힘들었던 우리는 이별을 했다가 '결혼, 까짓거 안하면 되지'하는 생각으로 다시 만나기도 했다. 이별하고도 공유캘린더를 지우지 않고 있었고, 그가 보고 싶었던 나는 암호처럼 12월24일에 ㅇㅇ식당이라고 적어두었다. 그 사람이라면 보고 올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렇게 다시 만나 우리는 몇년을 더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