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의 주범은 중국인가 우리인가?
따뜻하고 미세먼지 많은 날 vs. 춥고 공기 깨끗한 날
둘 중 고르라면 당연히 후자.
미세먼지 앱에서 초록색, 아니 노란색이라도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연일 미세먼지.
바깥에 돌아다니는 일을 최소화하고, 나가더라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
환경부는 미세먼지 평균농도가 나쁨일수가 2015년 이래 꾸준히 낮아왔음을 홍보하고 있다.
그것이 진실일지라도 매일 아침 마스크를 쓰고 출근, 등교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365일의 미세먼지 농도를 다 더해 그것을 다시 365로 나누어 평평해진 그래프 따위엔 관심 없다.
미세먼지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과거엔 시뿌연 공기를 들이마시며 축구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당장 폐병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었고, 수십년 지나 폐병에 걸려도 그 원인이 미세먼지라고 지목할 수조차 없던 시절이다. 그러나 최근 수년 사이 미세먼지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만큼 이를 경계할 수 있는 다양한 기술적 조치들이 세상에 나왔고 아침마다 미세먼지 앱을 체크하는 게 일상이 됐다. 적어도 애가 있는 집 엄마들이라면.
시민의 의식과 기준이 이만큼 높아지니 자연히 미세먼지가 뉴스의 소재가 되고 정책의 관심사가 됐다. 법이 현실을 뒤쫓아 가듯, 뉴스와 정책도 늘 시민의 의식을 뒤쫓는다. 그 뒤를 법이 따라오고.
시민들의 수년간의 미세먼지 투쟁의 결과 지난 2월15일 '미세먼지법'이라는 게 생겼다. 요즘 수시로 '재난문자'가 오는 이유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자동차 운행제한, 배출시설 가동률 조정을 하겠다 하는데 생업을 이유로 응하지 않는 사람 및 기업체에 대해 어떠한 제재 조치가 내려질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을 찾아보기 어렵다. 휴교와 휴업, 시차 출퇴근을 시행하겠다지만 이것이 법률까지 만들어 시행할 일인지 의문. 또, 미세먼지 특별위원회와 미세먼지개선기획단이 국무총리실 산하에 설치되었다고 하나 국무총리실 산하 수십개의 위원회들이 현재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보면 미세먼지특별위원회의 앞날을 긍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국가미세먼지정보센터라는 것이 생겨 배출원과 배출량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겠다고 하니 일단은 긍정적으로 보고 싶으나, 당장 이틀 전 미세먼지 씻겨줄 비가 내린다고 오보를 낸 우리나라 기상청 수준에 비춰볼 때 이들의 수준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는다.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국회의원들도 미세먼지의 심각성을 말하지만 이들이 근본적 대안을 마련하는 데에 이토록 더딘 이유는 싸워야 할 대상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뉴스를 독점하고 있는 '사립유치원 개원 연기 사태'에는 적과 아가 명확하다. 적은 한유총, 아는 정부와 시민. 시민이 한편을 먹어주니 정부로서도 싸울 의지가 충만해지고, 이에 비하면 한유총은 결집된 파워이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미세먼지 근본적 대안 마련을 위해 싸워야 할 적은 바로 시민들 속에 있다. 노후 경유차를 갖고 거리 장사를 하는 사람들, 로켓배송을 원하는 소비자들을 위해 쉼 없이 택배 차량을 운행해야 하는 사람들, 오토바이 퀵서비스 기사들, 폐기물 몰래 태워버리는 업주들, 자동차 2부제 따위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 등등.
낡은 트럭 갖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고 하는 사람들이 단속에 걸리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이를 적발한 지자체 혹은 경찰에 순순히 응할 것인가. 당장의 불응 제스처가 취해질 것은 불보듯 뻔하고, 이러한 단속에 걸린 이들은 (매연저감장치나 조기폐차를 상당한 수준으로 지원받지 못한다면)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지자체장, 더 나아가 국회의원, 대통령에 대해서까지 '투표'로 심판을 하려 들 것이다. 선거권/피선거권을 가진 이들의 정치 행위가 '공공의 선'이라는 포장지 속에 있지만 개인의 삶에 1이라도 마이너스가 되는 일에는 가차 없이 '개인의 선' 쪽 손을 드는 게 우리들이다. 인권 문제에는 진보적 목소리를 내는 이들 중 소득세, 종부세 등 세금 인상에는 극렬 반대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세금으로 복지가 유지되고 그것이 누군가의 인권을 보장하는 일임을 그들은 모르지 않는데도.
이처럼 우리 속에 적이 있고, 또 적이 있다한들 적을 명확히 규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미세먼지 주범으로 '중국'을 거론한다. 시민들 입장에서 '적'이라 말하는 데에 부담이 없는 상대이기 때문이다(외교를 해야 하는 정부로서는 이렇게 말도 못하지만, 시민들이 이렇게 말해주는 걸 고마워할 수도...).
결국,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직시해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렵다. 그래서 정치라는 게 존재하는데, 정치가들도 적가 아가 분명한 싸움에만 몰린다. 승자와 패자가 확실한 싸움이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싸움들은 짧고 굵다.
2019년의 세상에서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될까? 회색지대에서 길고 지난한 싸움을 할 의지와 능력을 가진 자들과 이들을 믿고 응원하고 기다려줄 시민의 힘이 빛을 발해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