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만에, 그러니까 아파트가 지어진 뒤 처음 엘리베이터가 교체됐다. 작년에.
쾌적함도 잠시. 한 평쯤 되는 네모 상자 속에 영상 광고판이 뒤이어 달렸다. 오르락 내리락 하며 쉴 새 없이 광고와 뉴스를 강제 시청할 수밖에 없다.
아이와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불편하다. 요사이 뉴스의 태반이 성폭력 관련 사건이다. 성폭력, 성희롱, 강간, 몰카 등등의 단어들이 수시로 광고판에 뜬다. 아이에게 친구들과의 신체접촉을 조심하라고 수시로 말하지만, 강간이 뭐냐고 묻는 아이에게 적절한 언어로 설명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얼마 안 있어 이 세상의 적나라한 얼굴을 마주할 아이에게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그제, SBS 앵커였던 김성준의 이름이 하루종일 뉴스를 점령했다. 멀쩡해보였던, 심지어 사회적 신망을 얻었던 중년 남자의 일탈. 그것은 우리에게 무얼 말해주는가.
만연한 강간 문화다. 뉴스를 진행하며 '성폭력에 대한 처벌이 미약하다'고 지적했던 사람이 성폭력 가해자가 됐다. 조용히 사건을 처리하려 했겠지만 위선의 가면은 결국 벗겨졌다. 옛날보다 나아진 게 있다면, 이젠 웬만해선 비밀이 지켜지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는 것. 권위주의는 여전하지만 권위는 해체되고 있다. 이 간극을 인지,인정하지 못하는 올드보이들은 앞으로 더 처절한 수모를 겪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몇몇의 사건들을 봤다. 굳이 그 이름들을 이 곳에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뉴스에 공분하는 건 여성들 뿐만은 아니다. 남성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다만 여성들의 분노 뒤에는 실존적 '불안'이 뒤따른다는 게 결정적으로 다르다. 남성들은 '내가 가해자도 아닌데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며 '나는 다르다'는 눈빛을 쏜다. 그러는 사이 남혐, 여혐이 싹튼다. 여자는 '믿을 남자 없다'고 하고, 남자는 '남자를 싸잡아 욕하는 여자들' 딱지를 거침없이 내민다.
강간 문화가 한국에만 있으랴.
강성 페미니스트를 잠재우는 데에는 남자보다 여자의 목소리가 효과적이며, 강간문화를 해체하는 데에는 여자보다 남자의 목소리가 효과적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남성 언론인 Zaron Burnett III가 쓴 'A Gentlemen's guide to rape culture'는 널리 공유하고 싶다.
"일부 남성의 일탈적 행위 때문에 모든 남성들이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면 그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맞아. 이건 정당하지 않지. 그런데 이게 여자들 잘못이야? 아니면 잘못된 행동을 해서 남성 전체를 욕보인 그 일부 남자들의 잘못이야? 만일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네 행동마저 의심받게 만든 바로 그 일부 남자들한테 화를 내. 네가 어떤 남자이건간에, 여자들이 보통 남자들을 평가할 땐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 수밖에 없어. 이런 일반화가 불편해? 그럼 네가 뱀을 마주쳤을 때를 생각해봐. 넌 뱀이 어떤 해악을 끼칠지 알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겠지(그 뱀이 독이 있는 뱀이든 아니든). 이건 당연한 정글의 법칙 아냐? 여자가 남자들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여성의 73%는 '아는' 남성에 의해 성폭력을 당함). 여자들이 남자에 대해 공포감을 갖는 건 바로 너네들, 남성들의 책임이라고. 너희가 강간문화를 만든 건 아니지 물론. 그렇지만 너희들은 알면서 막지도 못했어. 남자들이 사회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은 참 멋진 것들이지만, 그 중에는 바로 강간문화도 있다고. 남자들 스스로가 강간문화의 일부라는 얘기지.
Zaron Burnett III는 강강문화에 대처하는 남자들의 행동 수칙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여성을 대상화 하거나 깎아내리는 언어를 쓰지 않는다
(Avoid using language that objectifies or degrades women)
· 모욕적 농담이나 강간을 사소하게 치부하는 말을 들으면 바로 지적한다
(Speak out if you hear someone else making an offensive joke or trivializing rape)
· 친구가 강간당했다고 고백하면, 그 상황을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지지자의 입장이 되어라
(If a friend says she has been raped, take her seriously and be supportive)
· 여성, 남성, 남녀문제, 폭력 등을 다루는 미디어의 태도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라
(Think critically about the media’s messages about women, men, relationships, and violence)
· 타인과의 물리적 거리 유지에 신경 쓰라
(Be respectful of others’ physical space even in casual situations)
· 파트너와 항상 의견을 나누고, 관계에 대해 동의했다고 섣불리 간주하지 말라
(Always communicate with sexual partners and do not assume consent)
· 당신만의 남성성, 여성성을 정의하라. 정형화된 남성성, 여성성에 얽매여 행동하지 말라
(Define your own manhood or womanhood. Do not let stereotypes shape your actions)
출처: https://humanparts.medium.com/a-gentlemens-guide-to-rape-culture-7fc86c50dc4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