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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을산다 Aug 23. 2019

조국유감

15년쯤 전, 여름 방학에 언론사 인턴을 했다. 졸업을 앞두고 절박한 심정으로 이곳저곳 두드린 끝에 합격을 했다. 인턴을 시작하고 보름여쯤 지나서 어린 남자애 하나가 ‘같이 인턴을 할 애’라며 왔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고 잠깐 귀국했는데, 스펙이 필요해서 같이 인턴을 하게 됐다는 설명을 들었다. 이름만 대면 아는 학계 저명인사 K 대 Y교수의 자제였다.


국회에는 수많은 인턴들이 있다. 백만 원 조금 넘는 박봉이지만 피터지는 경쟁터다. 특정 의원 방의인턴 채용 공고가 나면 수십 수백장 원서가 날아들지만 그 중 한, 둘쯤 뽑힌다. 말이 좋아 공개채용이지, 적지 않은 경우 의원님의 지인 자녀가 낙하선처럼 떨어진다. J의원은 친구의 딸을 인턴으로 들였고 L의원은 다른 정치인의 아들을 인턴으로 들였다. J의원의 딸은 1년 조금 넘게 인턴을 한 뒤 정식 보좌진에 합류했다.


공공기관, NGO 관계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들도 있다.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방학 때 나온 모 시민사회 단체 자문 교수의 자녀를 인턴으로 채용했다거나, 시민사회 단체 관계자의 친척을 인턴으로 채용했다는 류의 것이다. 인턴 채용이라는 것이 대체로 실무급에서 이뤄지니 윗분들이 친히 전화를 해서 ‘한 번 챙겨달라’ 하시는 거다. 이런 경우 열 중 아홉도 아닌 열 명 모두가 ‘네 잘 챙겨보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회적으로 양질의 네트워크를 가진 부모를 갖는다는 것. 그것은 비단 ‘잘 먹고 잘 사는 수준’의 문제를 넘어선다. 부모가 교류하는 사람들의 문화를 자식들이 자연스레 흡수하고 물려받는다는 것이다. 이를 흔히 ‘문화자본’이라고 한다. 돈으로 살 수 없어 더 아득하게 느껴지는 그것. 그리고 이것이 바로 ‘기득권’과 ‘비기득권’ 간 넘기 어려운 선이 된다.

과거에는 권력을 기반으로 한 기득권과 돈을 기반으로 한 기득권이 상당히 나뉘어 있었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문화 자본이라는 것도 결이 달랐다. 그러나 요즘은 권력과 돈의 유착이 수시로 이뤄진다. ‘돈과 명예를 모두 탐하지 말라’는 나름의 사회적 금도는 폐기된 지 오래다. 돈 없는 권력은 외줄 위 재주꾼이 되었고, 권력 없는 돈은 수시로 줄을 흔들어대는 힘 센 훼방꾼이 됐다. 결국 돈과 권력은 서로를 원하는 관계가 됐음을 만천하가 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그렇다.

부모들의 돈+권력이 만들어내는 문화 자본은 고스란히 그들의 자식들에게 상속된다. 돈과 권력이 서로 견제하는 대신 유착해서 만든 기득권은 그 힘이 더 세다. 이 힘은 자녀의 교육 기회로, 직업 선택의 광활한 자유로 연결된다. 돈과 권력을 가진 부모의 자식들이 해외로, 국제학교로, 귀족 대안학교로 가며 공교육을 비웃은 뒤 다시 대한민국 땅에 돌아와 ‘특별’자 붙은 전형으로 채용, 입시를 치른다. 이때 부모들의 사회적자본, 문화적자본이 힘을 발휘한다. 교수, 언론인 등이 삼성 장충기 사장에게 자식 취업을 부탁하며 읍소한 문자를 떠올려보라.


조국 교수가 법무부장관에 지명됐다. 언론과 야당의 공세는 예정된 수순이다. 웅동학원 세금탈루, 사모펀드 문제에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고등학생 딸의 논문 제1저자 문제 등을 보며 필부필부들은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교수라는 막강한 엘리트적 지위, 빵빵한 경제적 배경을 가진 부모 덕에 ‘해외체류-외고 특별전형 입학-의대교수와 논문 집필-고려대입학-서울대환경대학원 재학-부산대 의전원 입학과 장학금 수혜’로 이어진 28살 어느 여성의 삶을 보며, 많은 이들이 좌절했다.

돈과 권력이 없어 금수저는 고사하고 동수저라도 물려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던 수많은 부모들이 기득권 리그 안에서 펼쳐졌던 품앗이-문화자본 공유-에 분노했다. 조국 교수의 가족이 속한 리그 구성원들이 공유했던 문화자본이 내 자식들이 오를 사다리를 어떻게 차버렸는지 생생히 전해듣는 마음은 쓰리다 못해 원통하기까지 하다. 법대로 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기에 더욱 그러하다. 법과 제도란 것이 강자들의 무기임을 이렇게 또 깨닫는다.

이들의 자식들은 또 어떠한가.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이 아니라, 붕어, 개구리, 가재도 행복한 개천을 만들자’며 옳은 말 따박따박 하던, 우리사회 마지막 양심 같던 엘리트의 민낯을 보고 또 다시 ‘헬조선’을 외친다. 돈도 있고, 심지어 외모까지 갖춘(! 이라며 열광하던 남녀노소 불문 그들…) 선한 엘리트가 권력까지 잡아 이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달라고 열광 했던 그들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표리부동, 이율배반, 자가당착, 후안무치, 곡학아세의 전형이라니!

진보의 아이콘을 자처했고 그 힘으로 사회참여적 교수의 모델이 됐으며, 또 이것이 정치권의 러브콜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입이 내뱉는 말과  자신이 몸 담은 세계 간 간극을 조정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공적인 자리에 가서도, 그는 죽창을 외치며 진보로 가장한 선동을 했다. 사필귀정이다.


누군가는 불법이 아니라고 한다. 또 누군가는 우리 교육 제도가 허용한 범위 내에 있다고 한다. 맞다. 그렇지만, 딸을 저렇게 키우고 있는 사람이 ‘개천용 무용론’을 입에 올리지는 말았어야 한다. 그는 대중을 기만했다. 이익을 취하려거든, 최소한 권력은 탐하지 말았어야 한다. 여기서 참고할 사례가 있다. 영국의 노동당 당수인 제레미 코빈은 아들이 초등학생일 때 부인과 이혼 했다. 한참 뒤에 밝혀진 이혼 사유는 아들의 교육 문제였다. 아들을 grammar school(우리식으로는 명문 사립초 정도)에 보내야 한다는 아내와 local comprehensive school(공립초)에 보내야 한다는 남편이 대립하다 끝내 헤어진 것이다. 노동당은 정책으로 교육평등 강화를 밀고 있었기에, 당시 노동당 소속 다수 정치인들이 자식 교육 문제를 두고 딜레마에 빠졌다. 이를 두고 보수진영에서는 ‘자기 아내조차 설득하지 못하는 정책은 폐기를 검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비꼬았다(참고: https://www.theguardian.com/politics/1999/may/13/uk.politicalnews2).   


또 누군가는 ‘자식 교육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이가 누가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참으로 오만한 386기득권 세대의 전형적 사고다. 자식 교육에 본격 목매기 시작한 세대가 386세대다. 우리 사회가 원정출산, 영어교육을 위한 혀수술, 입학사정관제 도입과 사교육의 무한증식을 꼬집을 때와 386세대의 자녀출산 및 중고등학교 입학 시기가 공교롭게도 겹친다. 사커맘, 헬리콥터맘부터 돼지맘이란 조어들도 모두 386세대 부모와 함께 떠올랐다. 386세대만큼 자식 교육에 유난한 세대가 없었다. 혹여 있다 해도, 그들은 386세대처럼 ‘정의 평등 공정’ 등을 입버릇처럼 말하지는 않았다. 또, 인사청문회를 보며 자라온 세대들이라면 공적인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몸가짐에 대해 고민을 했다. 386세대의 한계다(참고: <386세대유감(웅진지식하우스)>.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진영 논리에 사로잡혀 선악을 구분하는 눈조차 흐릿해진 것 같다. 정치에 있어 도덕, 원칙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없고 팬심과 정권 수호 구호만 난무한다.

요즘 한국은 전체주의 사회가 된 것 같아 무섭다. 전체주의, 권위주의, 파시즘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386세대유감


개인의 이익 차원에서 보면 불의가 정의보다 훨씬 더 유익하다(플라톤의 <국가론> 중 트라시마코스의 반론 중)


#조국 #헬조선 #표리부동 #386세대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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