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불행 위에 쌓아 올려진 부를 누리지만 다수의 불행에는 무감한 공간
책 광고를 보다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라는 책을 만났다.
어제, 교육부는 정시 확대를 골자로 한 대입 개편안을 발표했다.
대한민국에는 대학을 가는 7-80%의 열아홉살들이 있고, 이 가운데 정시니 수시니 하는 것들이 피부에 닿는 열아홉은 20%가 안 된다고 한다.
7-80%에도 끼지 않는 열아홉,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의 이야기는 수시로 잊혀진다.
정부조차 7-80% 국민만의, 어쩌면 20%도 안 되는 국민만의 정부임을 스스럼 없이 드러낸다.
김용균을 말하지만 그 누구도 내가 김용균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고, 되고 싶지 않다고 적극적으로 희망한다.
“이제 나는 극소수가 누리는 부가
다수의 불행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무심히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실라 로보섬(<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서 인용)
세상은 아픈데,
학교에 갇혀 숫자로 약자들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못해 위선적이라 느껴지기까지 한다.
약자를 눈 앞에서 보고 느끼지 않는 교수들이 엘리트라는 이름표를 달고 이 세상 꼭대기에 앉아 세상을 논한다.
밥 한끼를 사도 연구비 카드를 쓰고 조교를 학교가 고용해준 개인 비서로 아는 사람이 ‘갑질’ 신문기사에 분노를 섞어 비판한다.
국제학교, 사립학교, 대안학교, 혹은 외국으로 자식들 보낸 이들이 조국사태에 분노하는 학생들에게 ‘역사의식이 없어 저런다’고 혀를 찬다.
내 자식이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이길 바란다.
‘지금’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건 어불성설이다.
학교를 떠나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