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바닥을 보지 못했나
윤석렬, 그리고 조국을 균열점으로 삼아 한바탕 대전이 또 다시 펼쳐질 모양새다.
나의 소셜미디어 타임라인은 이미 전쟁이 시작됐다. 조국을 '예수'에 빗대어, 혹은 김대중과 노무현에 빗대어 전위부대를 자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자신뿐 아니라 어머니까지 민주화운동에 투신해 옥고를 치룬 386세대로서 이런 상황이 부끄럽다고 자성하는 사람도 있다. 윤석열이 '살아있는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는' 법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치켜세우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나는 이 일련의 소란이 정치가 죽어서, 특히 정치의 정점에 선 대통령이 정치를 혐오해서 생긴 일이라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유산을 얼떨결에 받아 안아 억지로 정치 무대에 끌려나온 결과가 오늘에 이르렀다고 강력히 의심한다. 2016년 촛불이 점령했던 광화문은 그를 정치인으로 만들지 못한 모양이다. 다들 죽겠다 죽겠다 난리인데, 이토록 오래 정치놀음을 방치하고 있다.
그래도 나아질 줄 알았다. 아니, 2012년 그때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정권이 연장되던 그 해보다 어떻게 더 나빠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2020년 지금, 나는 2012년보다 한 치도 나아지지 않은 현실을 그때의 기록을 통해 깨달았다. 바닥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바닥을 보지 못한 모양이다.
2012.12.20 페북 기록:
회사를 그만두고 이곳에 공부해보겠다고 온 뒤로, 줄곧 내 머리 속 한켠을 차지해온 것은 민주주의라는 단어였다.
툭하면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이 나라 저 나라 내정에 간섭하고, 경제 주권을 위협하며, 군사작전까지 감행하는 미국이란 나라에 있으면서 민주주의는 더 더욱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나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도저히 할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가 "왜 민주주의를 지켜야하냐"고 물으면 시시껄렁한 답이나 할 수밖에 없다. 나의 부모에게 민주주의의 가치가 무엇이라고 체감할 수있는 근거를 대며 설득하기 어렵다. 그래서 난, 평생 한나라당만 찍어온 우리 엄마 아빠에게 "앞으로 엄마 아빠의 자식들이 더 많이 살아갈 나라인데, 자식들이 선택한 사람을 한 번만 지지해달라"고 말했다. 그 말은 통했다. 자식들의 선택은 다수에 의해 선택되지 못했지만…
오늘 하루 마음이 참 무거웠다.
그렇지만 결과에 승복하고싶지 않은 이 마음은 하루, 이틀, 사흘을 지나며 금세 희석될 것이다.
그런데 돌아보니 지난 1년 마음 속에 작은 돌덩이 하나가 들어앉아 있어더랬다. 미웠어도 고왔어도, 내가 부대끼며 살아왔던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의무, 정의감 뭐 등등의 이유를 들어 펜을 무기로 삼아 싸워왔던 사람들이, 칼질 한 번에 허무하게 스러져나가는 볏단처럼 그렇게 스러져가는걸 멀리서 지켜봐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거꾸로 물어본다.
만일 과거 나의 동료들이 자유로이 펜대를 휘두를 수 있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결과를 받아들었을까.
또, 만일 검찰이 정치에 발 담그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이같은 결과가 나왔을까.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란다. 그래서 선거 결과를 부정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외신들도 '독재자'의 딸을 강조하지만 "그래도 너네가 선거로 뽑았잖아"라며 더 이상 박근혜를 욕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국민을 조롱하는 것 같다.
지난 5년 우리나라의 언로는 계속 좁아졌다. 정치에 부역하는 검사들이 창피함도 잊은 것 같다.
만일 이 둘만이라도 제 역할을 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결과를 이만큼이나 아픈 마음으로 받아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대통령 당선자는 참 많은 카드를 들고 있다. 이 둘을 제 자리에 갖다놓는 것만으로도 독재자의 딸 이미지는 어느새 가려지고 "독재를 통렬히 반성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여성 대통령"의 이미지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어제 광화문 광장에서 말한 것처럼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 그의 약속 가운데 언론과 검찰 정상화에 대한 약속이 없는 건 함정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