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원도 민주당 후보 찍기를 주저한 선거
"누가 덜 나쁜가"
대한민국의 선거는 '더 나은' 정치인을 뽑기 위한 장이 아닌 '덜 나쁜' 정치인을 뽑는 장이 되어버렸다. 대한민국 제1, 제2 도시 수장자리가 공교롭게도 모두 성(sex) 관련 비위로 공석이 돼 벌어진 선거. 희망의 언어는 실종됐고, 그 자리를 '생태탕'과 '백바지', '페라가모 로퍼'가 차지했다. "인물" 차원에서라면 이미 10년 전 무상급식 논쟁으로 정치적 단두대에 올라 혹독한 심판을 받고 그 사이 두 번의 선거 출마에서도 줄줄이 고배를 마셨던 오세훈에 비해, 4선의 국회의원을 지내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까지 지내며 '삼성저격수'와 같은 나름의 정치적 브랜드까지 획득했던 박영선이 5배쯤 낫다는 데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거 승패는 "인물"이 "당"과 "조직"을 넘어서기 힘들다. 하물며, 민주당 소속 전직 시장들의 비위가 보궐선거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또, 임기를 채 1년도 남기지 않은 대통령의 정국 장악력이 하락곡선을 타고 있는 이 즈음에 "조직"도 예전처럼 기민하게 가동되지 않는다. 양반집 곳간 비어가는 건 객들이 잘 안다.
결국 민주당은 참패했다. 당비까지 내는 나같은 민주당원조차 민주당 후보에 표를 주기가 내키지 않았으니, 중도의 표심이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1) 보궐선거의 원인제공자이며 2) 당헌당규를 개정하면서까지 원칙 없는 욕심을 부려 후보를 낸 데다 3) 부동산문제로 성난 민심에 LH사태가 기름을 붓고, 여기에 불씨까지 제공한 김상조, 박주민이 있었고 (더 악질적인 사람들은 더 많겠으나... 기사로 사태를 접하는 대중은 이들의 이름만 보인다), 마지막으로 4) 정책과 품위, 긍정의 언어로 정면돌파를 하기 보다 증거조차 빈약한 '생태탕' 음해와 부정의 언어가 판을 쳤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빨간 맛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1~4에 대한 민주당의 태도를 보며 선거 막판까지 표심을 저울질 했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는 법. 다만 선거 결과를 보며, 또 지나온 몇몇 장면 중 개인적으로 복기해볼 필요가 있는 지점들을 간략히 정리해두고자 한다.
# 빨간색으로 물든 서울
개표가 절반도 되지 않은 상황이나, 서울시가 빨갛게 물들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한강 이북 동쪽과 한강 이남 서쪽 지역조차 오세훈 지지가 강하게 나타났다. 이들 지역조차 등을 돌리게 만든 요인은 부동산 뿐일까?
(사진: KBS 캡쳐)
# 20대의 예사롭지 않은 선택
2-30대에서 여성의 민주당 지지세가 남성보다 높게 나타났고, 민주당 지지세가 원래 높은 4-50대에서는 남성들의 민주당 지지가 여성보다 높게 나타났다. 민주당이 '진보적'이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보지만,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고 한다면 2-30대는 여성이 남성보다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지점이라 하겠다. 20대 남성 중 무려 "72.5%"가 오세훈을 지지한 것은 매우 놀라운 지점. 지난 수년간 '페미니즘'이 발호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지? 20대의 남녀 간 인식 격차는 갈등의 근원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결혼, 출산 등 국가 인력정책과도 맞물리는 문제.
또 다른 특이한 점은 20대 여성 중 "기타"를 선택한 이들이 15.1%나 된다는 사실. 여성의 당 김진아가 무려 4위를 차지한 것과 연결지을 수 있는 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앞선 서울시장 선거에서 녹색당 후보로 나와 '페미니스트 시장'을 내걸었던 신지예는 6위...
# 실 없던 공약이 현실로...허경영의 비상
허경영은 대선에도 출마했던 인물이지만 이번 선거에서만큼 '긍정적' 피드백을 받았던 적도 없었던 듯 하다. 개표가 절반쯤 진행된 상황에서 2만4천표 가량이 나왔으니 아마도 그는 역대 최다 득표, 최고 순위를 기록하게 될지도? 허경영의 초현실은 현실이 된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던 선거운동원들을 꼽으라면 단연 허경영 선거운동원들이었다는 점도 흥미로운 관찰.
# 무려 15명의 후보
0.1%대 득표도 달성하지 못하는 무수한 후보들을 보고 있자니, 이들은 어떤 결심과 각오로 선거판에 뛰어들었는가 심히 궁금해진다. 일부는 이력을 통해 짐작할 수 있으나, 몇몇은 아예 맥락을 알 수 없는 출마. 서울시장 출마를 위한 기탁금이 5천만 원으로 적지 않은 금액인데, 여기에 선거사무소 운영과 홍보비 등을 생각하면 보통의 필부필부에겐 출마가 쉽지 않은 일이다. 돈 없으면 정치도 할 수 없는 현실. 개표가 이뤄지고 있는 이 시간까지 유투브로 모금활동을 하고 있는 신지예를 보니 짠함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에겐 어떤 소명이 있는 것일까?
# 극렬 지지자와 이들 등에 업힌 정치인들
음모론의 대가 김어준발 '생태탕'이 서울시장 선거를 집어삼켰다. 김어준에게 '픽'되느냐 되지 못하느냐에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 정치인들이 목을 맨다는 건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사실. 세상은 변하는데 10년 전 나꼼수와 나꼼수를 사랑하는 정치인들의 두뇌회로는 그대로 멈춰있는지, 김어준이 던져준 아이템을 그대로 물고 선거 끝까지 밀어붙였다. 증거가 없으니 아무말 대잔치와 헛발질이 난무했다. 이 정도라면 김어준이 X맨인 건 알아야 하지 않나?
청년당원 카톡방에서는 오늘 민주당의 선거 참패를 두고 "기레기 탓"이라는 성토가 줄을 잇고 있다. 기꺼이 '양념'이 되길 자처한 2-30대 당원들에게 나는 할많하않 뿐.
# 박영선의 말
패색이 짙어지면 이성과 함께 품위도 잃는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 토론. 만날 싸우기만 하는 두 후보자에게 사회자가 "서로 칭찬 한 마디씩 해보라"고 주문하자, 박영선은 오세훈에게 고작 패션감각과 언변이 좋다고 내키지 않는 칭찬을 억지로 했다. 반면, 오세훈은 칭찬받은 그 언변을 살려 박영선이 여성 정치인으로서 유리천장을 깨왔고 이것이 어린 아이들에게 모범이 된다는 칭찬다운 칭찬을 했다. 스쳐지나가는 멘트였지만 사람의 '됨됨이'를 짐작케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박영선이 실력만큼이나 됨됨이까지 좋아진다면(비단 위의 사례만 갖고 하는 이야기는 아님), 그는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철희의 메뚜기...386의 DNA를 떠올리다
요사이 선거방송이 다채로워지면서 보는 재미가 있다. 화려한 그래픽도 보는 즐거움을 주지만, 깊이 있는 선거 해설을 제공하는 코멘테이터들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좋다.
개표 초반 SBS를 보니 소속이 달랐던 전직 국회의원 두 명이 앉아있다. 이철희와 김현아. 정치연구와 정치실전경험을 두루 겸비한 이철희의 코멘트와 절제된 언어로 겸손하게 승리를 평가하는 김현아의 코멘트가 좋았다.
1시간 뒤쯤 KBS로 채널을 돌리니 이철희가 또 앉아 있다. 방송국의 게으른 섭외력을 탓해야 할지 (이철희 말고 다른 사람은 안 되는 겁니까???), 이철희의 상도의 없는 태도를 지적해야 할지... 영 찜찜했다.
민주당을 장악한 386세대 정치인들을 향해 이번 참패를 계기로 인적쇄신을 단행해야 한다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또 '내로남불'이 떠올랐다.
"사회의 주도권을 잡은 지 어언 20년, 너무 오래 머물고 있다. 어제의 개혁이 내일의 부담으로 바뀌는 것이 세상의 이치, 이젠 비워주고 비켜설 때!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이철희의 <386세대유감> 추천사 중.
이제 민주당은 어디로 가는가?
무능하고 비대한, 게다가 욕심까지 많게 비춰진 민주당의 존재가 또 다시 국민의힘을 소생시켰다. 어정쩡한 쇄신 레토릭으로 또 이 시기를 지날 것인가?
시대는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는데, 시대에 갇힌 인물들은 좀체 과거를 벗어날 줄 모르는 듯 싶다. 이번 위기 극복도 ‘나 아니면 안 돼’ 정신으로 헤쳐갈지...? 1년짜리 시장자리 두 곳이 아니라 5년짜리 대통령 자리 내놓은 뒤에 정신차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