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말리기를 강박처럼 하는 엄마 덕분에! 혹은 때문에!
엄마가 이모집에 간 관계로, 오늘 아침 강아지와 산책을 나가며 아파트 앞 마당에 고추를 널었다. 경험치로 추측컨대, 우리 동네에는 고령자 비중이 꽤 높다. 그래서인지,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게 이 맘때쯤 사람 발길이 좀 뜸하다 싶은 볕 좋은 곳에 고추와 도토리가 질펀하게 널려 있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고추를 가지런히 펴고 있는 날 보시더니,
“그거 태양초에요? 젊은 사람이 기특하네. 이런 것도 할 줄 알고”
“아, 아니에요. 엄마가 시켜서…”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거 할줄 모르는 줄 알았더니! 나도 매년 말렸는데 이젠 힘들어서 못해. 이거 널어놓으면 밤에 잠도 못자."
"그쵸? 힘들더라고요 (옆에서 보기만 해도)."
"요새 젊은 사람이 누가 이런걸 해. 하여간 대단하네 아주."
“진짜로 엄마가 시켜서…”
“시킨다고 다 하나. 기특해 기특해.”
졸지에 기특한 효녀, 요즘 사람 같지 않은 철든 젊은이가 되어버렸다. '힘들어서 이것도 못 하겠다. 올해가 마지막'이라며 거짓말을 매해 반복하는 엄마를 보며 "사먹는 거랑 뭐가 다른 거냐"며 어제까지도 궁시렁대던 나인데.
으쓱한 마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의기양양 고추 소식을 전하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추가 걱정된 엄마의 전화벨이 드르륵거린다.
"고추 널라고 전화했지?"
"하하. 그렇지. 어제처럼 널..."
"벌써 다 널고 산책가는 길이야. 하여간 고추 걱정은!"
"어머 벌써? 호호호"
엄마의 반복되는 거짓말이 앞으로 몇 년은 더 지속되면 좋겠다고 은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