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세바시와 우리엄마의 콜라보레이션
역사는 보통 위대한 사람들 이야기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역사는 위대한 사람들 이야기만 기록되어 있을까요? 그 이유는 평범한 사람들이 우리 각자의 인생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자 노명우 교수의 이야기이다. (출처: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당신의 인생을 글로 써야 하는 이유)
그는 본인의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를 기록해서 책으로 출간했다. 처음에는 본인 부모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를 썼지만, 책이 완성되었을 때 개인을 넘어 무수히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크게 와 닿은 바가 있어 나도 엄마의 삶을 기록해 본다.
스물두 살에 시집온 엄마는 서른두 살에 나를 출산했다. 그 십 년 사이에, 본인보다 늦게 시집간 시누들의 배부름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엄마의 조바심은 얼마나 컸을까. 그녀가 시집온 동네는 남의 집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알만한 좁은 동네였는데, 사람들은 굳이 인사치레로 아이 소식을 물어봤다고 한다. 그때마다 엄마는 설명할 수 없는 죄스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엄마의 마음속엔 삼신할머니가 늘 함께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1980년대~1990년 경제 호황기. 남들은 돈 벌러 상경할 때, 그녀는 출산을 위해 서울에 왔다. 시골에서는 시부모님을 포함한 인간관계에 대한 불편함이 문제였다면, 익명의 서울 생활에서는 먹고살기 바쁜 게 스트레스이지 않았을까? 역시나 임신은 잘 안 되었나 보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어느 날 우연히 옆집 아줌마의 귀띔으로 인공수정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의학의 힘을 빌려 나를 가졌다고 한다. 그 당시, 대구에서 온 어느 노부부는 집을 2채를 팔았는데도 본인이 더 빨리 가졌었다고, 자기는 운이 좋아한 번에 성공했다고, 아직도 안심하신다.
2년 후, 그녀의 배우자는 심장마비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판막 2개가 상했다고 한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45일 동안 중환자실에 있었는데, 입원 첫째 날, 그녀는 3살 배기 아이를 업고 면회를 갔다. 왜 갓난아기를 이런데 데리고 오냐는 병원 관계자의 불호령 때문이었을까. 그다음 날부터 나는 상도동에 위치한 작은 아버지네 집에서 약 10개월을 살았다고 한다.
남편이 퇴원하고, 먹고는 살아야 했으므로 식당을 운영했다. 만만치가 않았고, 시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숭실대 근처에 전셋집을 얻어 업종을 하숙집 주인으로 바꾸었다. “셰어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걸 보면 역시 유행은 돌고 도나보다.
내가 5살 때, 다시 고향인 아산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심장 수술한 사람이 견딜만한 맑은 환경이 필요했던 걸까. 아니면 시골사람에게 도시생활이 버거웠을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건 다시 내려온 것이다. 한적한 시골에 벽돌로 집을 다시 지었고, 다시 불편한 시부모님을 포함해 가족은 5명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직업은 농업인. 남편의 직업은 회사원 겸 농업인.
남편이 회사에 갈 땐 혼자 고추를 따고, 참깨를 털어야 했으며, 풀도 매고, 논에 물을 대야 했다. 이웃들은 부부가 함께 했고, 우리 집은 그녀 혼자 도맡아 했다. 이때부터는 나도 기억이 있다. 7살쯤 할아버지는 풍을 맞았으며, 그때부터 하반신을 사용 못하였다. 정상인 사람이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되었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병원에 중독되었고,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 하루에 2곳씩 8년 동안 매일매일 다녔다. 한 번은 다리 고쳐주는 약을 사 오셨는데, 그 약은 그저 소화 안 될 때 먹는 환약이었고, 아버지는 가격 때문에 할아버지랑 싸웠던 기억이 난다. 엄마의 직업은 주부, 농업인, (간절한 할아버지의) 요양보호사, 운전기사였다. 8년 뒤, 할아버지는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1년 뒤 할머니가 크게 허리를 다치셨고 수술을 했다. 이번에도 엄마는 3년 동안 또다시 요양보호사가 되었다. 우리 할머니는 늘 삐딱하고, 질투 많고, 같은 말을 해도 네 번 정도 꼬아서 얘기한다. 고약한 성격 때문에 자기화를 못 이겨 몇 번 쓰러진 이력을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고, 나는 “고려장 이야기”를 포함한 효자 열녀에 관한 이야기에 한 올의 의문을 가졌다.
‘이건 어쩌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며느리를 떠나지 않게끔 하기 위한 누군가의 의도적 장치일 것이다.’ 2008년, 엄마는 거친 농업일로 허리디스크 시술도 받았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타지 생활을 해서 잘 몰랐었다. ) 얼마 전에 알았는데, 그 해 우울증도 같이 와서 지금까지 신경정신과 약을 드신다. 약이 없으면 잠을 못 잔다고 한다.
난 8년 만에 고향으로 취업을 해 집에 돌아왔고, 어엿하게 사회인이 되었다. 첫 월급 타서 엄마에게 드렸던 기억이 난다. 어느 엄마나 마찬가지겠지만, 귀한 자식 군대까지 무사히 다녀와 대학도 졸업하고, 취업해서 용돈까지 받는데, 남부러울 게 뭐가 있을까.
안심도 잠시, 취업하고 3개월쯤 되던 2015년 2월 16일.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한 번 더 쓰러졌고, 3일 만에 사망했다. 아마 이때부터지? 엄마는 습관적으로 얘기하신다. “네 아빠는 겁이 많았어. 어차피 마취하는데 그게 뭐라고. 엄마가 몸만 건강했어도, 네 아빠 병원 따라다니면서 반드시 시술 시켰을 거야. 내 몸 챙기느라 신경을 못 썼네.”
아버지는 주기적으로 1년에 한 번씩 병원에 다니며 검진을 받았고, 의사는 판막이 오래되어 재수술을 권했다고 한다.(그때의 시기는 나 고등학교 시절, 엄마가 허리디스크 시술하고 우울증 앓던 그 시절이다.) 사실 그는 20년 전에 한 그 수술이 너무 무서워서 계속 안 한다고 고집을 부렸고, 엄마는 본인 몸 챙기느라고 미처 그를 설득하지 못했다.
작년, 할머니는 치매가 왔고 배변을 못 가리신다. 정신은 멀쩡한데, 배변하는 방법을 잃어 버렸다. 기저귀를 차고, 걷지도 못한다. 엄마는 8개월 동안 그녀의 배변을 받았다. 어느 날, 할머니는 갑자기 쓰러졌고 구급차에 실려 췌장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그녀의 나이 90세. 다시 완쾌해서, 집에 돌아왔다. 배변을 받는 것은 또다시 엄마의 몫이었다. 그녀의 직업은 할머니의 요양 보호사.
그렇게 할머니를 돌본 지 1년, 상의 끝에 요양병원에 모시기로 하였고, 할머니는 나를 앉히고 얘기했다. “나 네 엄마 평생 고생한 거 아니까, 이제 요양병원 갈래.” 일주일 후, 할머니가 떠나는 그날, 병원에서 장정 2명이 왔고, 나는 "가기 싫다며 죽으러 가는 거 아니냐고 통곡하는" 할머니를 지켜보았다.
과연 애증이라는 말이 적절할까. 할머니는 이제 적응을 했고, 호전되어 다시 걷기까지 하신다. 하지만 여전히 병원에서도 막말을 서슴지 않으며 여러 요양 보호사의 미움을 사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갈 때마다 그들에게 바치는 약간의 조공과 병원비. 그러나 할머니로부터 스트레스 받을 그네들을 달래주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엄마는 항상 자기 입으로 말씀한다. 나는 슈퍼우먼이라고. 할아버지 살아 계셨을 때도, 모든 집안일은 본인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리고 너는 결혼하면 본인하고 같이 살 생각하지 말라고, 자기는 팔자가 사나웠었고,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이고, 너는 같은 고생 하지 말라고. 이게 바로 내리사랑이고, 너도 아기 낳아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우리 집안은 똑 부러지는 며느리 덕을 단단히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미덕을 칭찬하지만 그 이면을 보아온 나로선, 그만한 허울이 어디 있을까 싶다. 지금 엄마는 라인댄스 동호회를 다니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 하고 싶은 것 해본다며 감동한다. 얼마 전. 유튜브 보는 방법 알려줬더니, 너무 좋아하신다. 법정스님의 즉문즉설로 마음이 편해지고, 노화 방지하는 피부 관리법도 배우고, 생로병사의 비밀도 또 볼 수 있다고 신나 하는 모습을 보면 짠하다. 내년 봄에 친구들하고 라오스 여행 간다고 설레 하는 모습을 보니, 소녀 같다. 앞으로도 정말 철저히 자기만을 위한 여생을 보내길 희망한다.
시대가 여성에게 원했던 덕목 아래, 그 시대의 아내, 엄마, 며느리들은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강요 받았을까. 모성애는 너무 감사해야 할 권리인데, 나는 엄마의 사랑을 마땅히 여기진 않았던가. 난 왜 밖에서는 싫은소리 하나 못하고, 착한척, 매너있는 척하며 엄마 앞에서만 큰 소리치는 여포가 됬을까. 이 글은 그런 본능이 뛰어나올 때마다 나를 잠재우기 위한 장치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