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문꾼 Oct 21. 2019

성장에 스펙트럼이 있다면

<2019 씽큐베이션 2기, 씽큐베이션으로 성장하기>

 3개월 동안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

 이 글은 <2019 씽큐 베이션 2기, 씽큐 베이션으로 성장하기> 후기입니다.

Photo by Austin Distel on Unsplash

 

 <Intro. 새로운 경험, 데드라인>   


 꿈이 있다면, 내 글이 어딘가에 정기적으로 연재되는 것이다. 이왕 내가 쓰고 싶은 글이면 좋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바람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글은 내가 하고 싶은 그것과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마감 기일을 겪어보지 않은 나조차도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면, 죽음의 선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글이든, 해야 하는 글이든 연재할 자격이 있다면,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입장 바꿔 나 같은 소비자가 해당 요일의 웹툰을 가장 빠른 시간에 볼 수 있는 것도, 생산자가 그 약속을 지켰기 때문일 것이다.

 


 난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일이 해야 할 일이 되면, 그때부터 글에 대한 관점은 달라질 것이다. 낭만적이지만은 않을 것 같은 현실. 씽큐베이션은 그것들을 예행할 좋은 기회였다. 1주일에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편의 서평을 쓰는 건 취미 수준을 넘어서는 일이며, 꽤나 치열했다. 그렇기에 단순히 열정, 노력 따위의 무미건조함으로는 표현하고 싶지 않다.       

    


1. 과유불급: 지나친 욕심은 궁상을 낳고,


 3개월 동안 나는 내 한계를 뛰어넘었다. 데드라인을 지키기 위해 300페이지가 넘는 (스토리에 따라 술술 읽히는 것들이 아닌 비문학을) 책을 3일 만에 읽고 3일 동안 1편의 글을 썼다. 출근 전에 읽었고, 점심시간에 읽었고, 퇴근하고 읽었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줄였고,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놀이를 멈췄다. 꾸준히 해왔던 운동도 보류했으며, 영화도 두 개볼거 한 개만 보았다. (그나마 드라마나 예능에는 취미가 없어 참 다행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부 부작용도 있었다. 어떤 것들은 우선순위를 매기기가 쉽지 않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고,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나에겐 씽큐베이션의 데드라인도 중요했고, 여름휴가에 친구들과 계곡 가는 것도 중요했다.  우선순위가 충돌하기 시작하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나는 궁상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놀러 가 놓고, 다음날 그들이 기상하기 전에 미리 일어나 최대한 글을 욱여넣었다.비슷하게 업무시간 중 몰래 책읽기, 회식 이후에 했던 취중 독서가 그랬다.



 문제는 집중하기 힘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읽는 행위 자체만으로 안도감을 갖는 것이다. 내용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데, 넘어가는 책장의 진도가 나를 안심시킨다. 주객이 바뀐 아이러니와 함께 나는 한 권을 다 읽었다는 만족감에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왜 마감일을 죽음의 선이라 부르는지 알겠다. 마감일을 다루지 못하면, 이것은 얼마든 날 좀먹을 수 있다.     



 여기에 기존의 독서모임 스케줄을 계속 이어나갔다. 2주에 한번 모이는 독서토론 동아리 ‘남녀노서’, 1달에 한번 모이는 아산 서평 모임 ‘글 톡 말톡’, 아산시에서 주관하는 ‘1달에 1권 책 읽기 프로젝트’까지 하면 1개월에 7권의 책을 소화해야 했고, 글을 쓰고 말을 하려면 정독이 필요했다. 애매한 우선순위로 책 속에 파묻혔고, 과한 욕심 때문에, 부족한만 못할 뻔했다.


     

2. 책임 편향, 나만 고생한 것 같은 착각     



 정말 빠듯한 스케줄 속에서 시간의 틈새를 찾아 달려왔다.  나를 뛰어넘고,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아주며, 소통하고 피드백을 하기로 했다. 첫 3주 동안은 틈나는 대로 성실히 하였지만, 4회 차부터 서서히 흐지부지 되어갔다. 결국 그들의 글을 못 읽다가, 안 읽는 것이 되어버리고 내 숙제만 해왔다. 입장 바꾸었을 때 상대방은 어땠을까.  아쉽지만 내숙제 하기바쁜 나는 그들의 글과 소통하지 못했다.    



 우리는 자신을 실제보다 더 좋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를 ‘책임 편향’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다. 하지만, 자신의 기여도와 헌신에 대한 정보는 스스로 그 정도가 얼만한지 잘 알고 있다. 더 중요한 건, 실제보다 더 ‘과장되게’ 인식한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이것이 착각이라고. 나는 스스로의 마땅함에 취해, 책임 편향을 느꼈다. 그들도 바빴을 것이고, 그들의 헌신과 노력도 마찬가지였을텐데, 나 바쁜 것만 생각하고 내 숙제만 한 게 부끄럽다.



3. 뛰어넘고 싶은 언어의 한계



  몸에 좋은 건 음식만의 특권이 아니다. 난 3개월 동안 '양서'를 통해 몸에 좋은 세상의 언어를 맛보았다. 성장을 위한 여러 연구와 그 방법론으로부터 얻은 통찰 덕분에 난 글 쓰는데 수많은 시도를 했다. 구어체, 광고문, 비평 모두 기존의 서평에서는 생각도 못했던 것들이며, 이번 과정에서 거리낌 없이 도전했고, 스스로 괜찮은 시도라 생각했다. 서평이라는 장치로 통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진정성만으론 부족했다. 나는 내 생각을 잘 포장했어야 했다.



  “(난 이렇게, 저렇게 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냈으니) 제 글을 읽고 있는 그대도 해보세요.” 하지만 이게 과연 먹힐까. 언어 자체는 엄청난 한계를 가지고 있다. 팟캐스트 <지대넓얕>의 진행자 채사장은 그의 저서에서 언어의 한계를 잘 짚었다. 언어가 자아의 고립을 넘어 외부의 타자에게 닿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인데, 이 곳을 지나는 동안 처음의 모든 의도는 엉망이 되고 너덜너덜해진다. 허접해서, 노잼이라서, 과해서(too much) 내가 품은 것들은 추락했다. 내 의도는 잘 전달되지 못했다.  



 영화평론가 김태훈의 얘기를 빌렸다. "감독들은 영화를 만들 때 의미가 있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죠. 물론 어떤 감독들은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적으로 보여주곤 하지만,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거리감을 느끼죠. 그렇기에 노련한 감독들은 관객들이 발견하길 바라며 그 의미들을 영화 속에 숨깁니다."



 누군가를 납득시키긴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대도 해보세요.” 는 먹히지 않는다. 세상에 모범답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적, 공간적 맥락이 다르기에, 우리는 같은 세상 속 서로 다른 세계를 산다. 어린 시절이 달랐고, 소유의 크기가 다르고, 내 주변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다르다. 그렇기에 내 방법이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에게 맞을 리가 없다.



내가 괜챃았으니 너도 해보라고 하면, 오히려 강한 화살이 되어 되돌아오겠지. ‘그쪽이 뭔데 제 삶에 잣대를 정하시나요?’     



4. 인정 욕구


 그렇기에 누군가가 뒤로 가기를 누르지 않고, 내 글에 흥미를 가졌다면, 일단 첫 단추는 끼워진 것이다. 공감까지 얻었다면 그것은 엄청난 찬사다. 그러려면 내가 할 일은 납득의 언어를 더 갈고닦아야겠지.



 납득의 언어는 무엇일까. 자본주의에서는 이것을 ‘마케팅’이라고 부르고, 자본이 껴있지 않으면 ‘소통’이라 쓴다. 언제부턴가 ‘좋아요’라는 새로운 형태의 무형자산이 등장했다. 이것은 동기를 높이기도 하고, 집착을 부추긴다. 좋아요(조회수, 구독 마찬가지)가 늘 목적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이것들을 갈망했다.


Photo by George Pagan III on Unsplash

 계수가 높다 해서, 내 생각이 읽는 이에게 잘 전달된 것은 아니었을 텐데. 언제나 이것들을 원해왔다. 좋아요 100개가 중요할지, 한 사람에게라도 잘 전달될 납득이 중요할지는 이미 머리론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좋아요를 갈구한다는 건 인정 욕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반증이겠지.



 내 성장은 우상향곡선의 그래프가 아닌, 의도적 멈춤의 발견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읽고 쓰는 것을 즐기기 위한, 언어를 찾아갈 것이다. 이 글이 인정 욕구의 갑옷을 벗기 위한 어떤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치열한 독서보다는 생각을 곱씹을 예정이다. 관찰하고, 휴식이 되는 그런 읽음을 향해.


Photo by Hello I'm Nik on Unsplash


<참조>

- 토크콘서트 화통: 김태훈, 영화로 읽어내는 시대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채사장,웨일북스,2017

작가의 이전글 거친 세상속, 얼마나 안녕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