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배신으로 돌려준 너
‘하….’
그녀의 눈에 들어온 모임 자리에서의 그.
그렇다. 20살 첫 성인으로서 맞이했던 연애상대. 한 학년 선배와 입학하기도 전에 사귀게 되었던 그 남자.
<회상>
동기 여자들에게 내가 욕 먹고 있는 것을 보고도 방치만 하고 나몰라라 했던 그 남자.
지금 생각하면 바로 못쓸놈이란 걸 알아채고 걷어찼을텐데.
순수했던 영혼의 나는 20살의 첫 성인으로서의 사랑이라는 환상 때문에 눈에 콩깍지가 잔뜩 씌워 앞뒤 가리는 것 없이 아무것도 알아챌 수 없었다.
‘바보같긴…’
그 남자와 1년이 조금 안되는 기간을 사귀었다.
애정행각도 아주 잘했던 그는 언젠가 그의 하숙방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슈퍼트레쉬야.”
“응? 뭐라고? 슈퍼…트레쉬?”
순간 들어온 말에 잠깐 멍했다가 이내 뜻을 바로 해석하니 슈퍼 쓰레기… 였다.
“아니, 오빠 왜 오빠 자신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말해? 무슨 뜻이야?”
“음, 내 동네친구들이 나더러 슈퍼트레쉬라던데? 생각해 보니 맞는 거같아.”
이런 말을 던지면서 새삼 해맑게 싱글벙글 하면서 컴퓨터 게임을 이어서 하던 그였다.
나도 그냥 농담이라고만 치부하고 가볍게 넘긴 내 탓이다.(그래.사람을 못 알아 본 내 잘못이 맞지. 에휴.)
그러나 언제쯤인가부터 그는 나를 잡아놓은 물고기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친 게임 광이었다.
23살이었던 그는, 지금 생각하니 참 어리고 철모르는 나이였었네.
그땐 왜그리도 높게만 우러러 보였을까.
그러면서 점점 날 전혀 신경쓰지 않는 그에게 화가나기 시작했다.
종일 컴퓨터 게임만 하면서 이젠 내 연락도 온 걸 알면서도 씹어대기 일쑤여서 항상 하숙방으로 찾아가야지만 날 맞이했다.
벚꽃이 필 때, 어디 꽃놀이라던가, 아님 무슨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고싶었던 나는 속만 끓어댔다.
‘이게 뭐야….성인의 연애가 뭐 이래….’
이게 맞나 싶을정도로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 본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항상 그의 방에서만 수다를 떠는 정도였다. 밥을 먹는 정도라던가.
그 계기로 우린 참 자주 싸웠다.
그는 전혀 내 말을 들어주거나 고쳐줄 생각을 하지 않고 늘 무시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저 게임에 푹 빠져 나몰라라 방치만 한다니.
그렇지만 나는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나의 콩깍지는 여전히 벗겨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꽤 끈질기게 한 사람만 바라보는 타입이었던지라 싸우더라도 그와 함께 하고 싶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알바도 하고, 집에서 용돈도 보내주는데, 그와 달리 나는 집에서 형편이 여의치 않아, 용돈도 잘 못받고 오로지 내 스스로 알바를 투잡이상 해가면서 생활비를 벌어가며 지냈는데, 그런 나에게 보통 얻어먹는 스타일이었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저 댓가없이 베푸는 사랑이 그저 나에겐 당연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남자로써 그것도 선배가 오히려 감싸주기는 커녕 내 돈을 쏙쏙 빨대 꽂아 뽑아먹고 있었다란 걸, 몰랐다. 그는 나에게 돈을 쓰는 걸 아까워 했다.
왜 몰랐을까. 단지 갓 20살이 되어 어려서, 순수해서라는 이유는 그자체로 정답이 될 순 없었다. 그저 내 경험이 너무 없어서 무지해서 몰랐던 것이 맞는 이유일테지. 미련했다. 그저 미련하게 사랑했다.
그렇게 1년이 조금 못 채워졌을 무렵,
어느 날, 그는 사라졌다.
며칠 뒤 전전긍긍하며 울기만 바빴던 나에게 장문의 문자 한통이 날아왔다.
[나 너무 아파서 입원했어. 희귀병일 가능성이 높다는데, 제대로 검사받고 치료 오랫동안 받아야 할 거 같아서 학교도 휴학해야해. 집으로 내려가서 지내야 해. 이젠 우린 만날 수 없어. 그러니 찾지마. 잘지내.]
…
……
너무 어이가 없고 뒷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처음엔 화가 난다기 보다는 전혀 연락을 받지 않아, 그저 그 말만 믿고 나는 걱정만 앞섰고, 아프다고 해서 헤어져야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옆에서 보듬어주면 된다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그것이 애당초 헤어질 핑계를 댔다는 걸 눈치 조차 못 채서.
친구를 붙들고 엉엉 울면서 결국, 서울 큰 병원이란 말만 듣고 전화를 돌려 환자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찾았다….’
너무 걱정이 심하게 되서 눈으로 봐야 했다. 얼마나 심각하게 아픈 병에 걸렸는지 너무 눈물이 났다. 너무 안쓰럽고 불쌍해서.
친구에게 부탁해서 같이 용기내어 그의 병실을 찾아갔다.
눈이 동그래진 그와 그의 엄마. 그리고 조금 뒤늦게 나타난 그의 형이 있었다.
“어… 서정아.”
“아, 네가 서정이니?”
나는 울먹이며, 그의 어머니께 인사를 드렸고, 잠시만 그와 얘기 좀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울면서 그에게 마구 물었다. 대체 어디가 아픈지, 아프다고 해서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지 도저히 납득이 안되니 솔직하게 지금 당신의 상태를 말해달라고 했다.
그저 그는 대충 말을 허황되게 빙빙 돌릴 뿐이었다. 대전이 본가였던 그는, 집으로 내려가 요양을 해야하고, 어머니가 나를 별로 달갑지 않아하셔서 헤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지긋하다는 눈빛으로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그만 만나자고. 나 지금 아픈거 안 보여?”
애석했다. 미웠다. 끝까지 본인의 입장만 늘어놓은 그였다. 그럼에도 그 와중에도 나는 그가 아픈상태니 예민해져서 그랬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그를 붙들고 울먹이고 있는 나를 그의 형이 나를 밖으로 잠시 나가서 얘기하자며 불렀다.
“나 신태진 형이야. 지금 태진이가 많이 아파. 너도 봐서 알지? 근데 있잖아. 이제 태진이가 너 싫대잖아. 아픈데 여기까지 와서 붙드는 거 너네집 부모님도 알고 계시니? 그리고, 너네 집안하고 우리 집안하고 수준 레벨이 달라서 애초에 급이 안 맞아. 너 같은 거 애초에 안 될 사이라고. 이제야 알아 듣겠어?”
순간, 나는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건지 벙쪄 있었다.
나를 하대하며 우습다는 듯이 바라보는 저 표정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이내 정신이 들었다.
그를 진심을 다해 사랑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집안 얘기를 들먹이며 욕 보인다고…? 당신들이 우리 집을 뭘 알아서…?’
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불 같이 화가 치솟았다. 그때 깨달았다. 그가 자기를 스스로 슈퍼 쓰레기라고 칭한 이유.
이별도 잠수 이별도 모자라, 벼룩의 간을 떼어먹고, 모기처럼 빨때 꽂고 날 이용해 돈을 쓰게 하고, 입학했을 당시 그런 괴소문들로 인해 여자 선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어도 그저 방치만 하고 있었고, 컴퓨터에 미쳐서 연인을 연인답게 취급하지도 않았던 그를 내가 그토록 왜 사랑했을까.
그때야 정신이 들면서 알게 되었다. 미친 개 자식이라는 사실을.
정신이 들자, 오히려 더 또박또박 차분하게 말로 내리 꽂으며 얘기했다. 그의 형에게.
“당신이 우리 집을 뭘 알아? 그리고, 당신. 나 알아? 그리고, 당신. 당신 동생이 어떻게 행동하고 다니는지는 알고? 집안 수준? 이 따위로 갑작스레 걱정부터 되서 달려 온 연인한테 형이랍시고 불러내서 수준 거들먹 거리면서 남의 집안 욕하는 게 그쪽 집안 수준인가보지? 이 따위 모습을 보니 이제 내가 먼저 정이 떨어지네. 그 동안 몰랐던 내가 참 병신이었어. 이런 수준의 집안 인간이란 걸 진작에 알아챘어야 했는데 말야. 그러니 두 번 다시는 그 입 함부로 놀리지마. 집안?ㅋㅋㅋ웃기지도 않아서 참. 당신네 집안 뭐 있어? 아버지가 공무원인거 달랑 하나 그거? 아이고~. 제대로 벼슬 납셨네. 참 수준 알 만하다, 당신도, 당신네 집안도. 이젠 내가 싫어 그쪽 집안 따위. 알아들었으면 그 입 함부로 놀린거 반성이나 하면서 똑바로 살아.”
이렇게 말을 숨도 안쉬고 내뱉고 난 뒤 나는
“재수가 없으려니, 참네.”
마저 내뱉으며 뒤돌아 그대로 조금 떨어져 있던 친구를 데리고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제서야 나는 집에 돌아와 친구를 붙들고 찢어지게 메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너무 서러워서, 억울해서, 너무 마음이 마냥 아팠다. 계속 아팠다.
그렇게 한 달정도를 거의 식음을 전폐하고 피폐하게 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지냈다. 시간이 두어 달 흐르고, 12월이 찾아왔다.
11월 쯤에 그 사이, 좀 괜찮아진 나는 다시 태연하게 밝고 환하게 지내던 무렵, 제주도에서 잠시 살았던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전학가자마자 선생님이 안내해준 자리에 앉았는데, 짝궁이자 반장이었던 남자아이를 보고 첫 눈에 반했다.
외모를 떠나서 참 똘똘하고, 남자스러웠다.
그러나 그 나이에도 그에겐 여자친구가 있었다. 같은 반 여자아이였는데, 유독 성숙하고 신체발달도 좀 빠른 아이였고, 피아노 영재였으며 머리도 좋아 공부도 잘했던 인기많은 여자아이였다.
그래도 끈질기게 그에게 러브레터를 보내 계속해서 구애를 했지만 끝내 대놓고 무시당했었다. 세월이 흘러 어린 사춘기 소녀의 첫 이성적인 감정이 금세 사그러들고, 몇 년을 제주도에서 지내다 다시 엄마와 나는 한 지방으로 전학을 왔었다.
그런데, 여전히 제주도 친구들과 연락을 했었던 나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그 남자아이도 내가 다니는 같은 대학교에 속한 법대를 다닌다는 소식이었다.
이런 우연이….
너무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고, 그 제주도 친구로 인해 우리는 연락이 연결이 되어, 같이 수 년만에 학교 앞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간단히 조용한 펍에서 칵테일을 한 잔씩 하며, 오랜 기간동안의 수다를 떨었다.
다음 날에도 같이 저녁을 먹자거나, 공강시간이 맞으면 같이 점심을 먹자는 등.
그와 나는 더욱 빨리 친해졌다.
“그 때, 참 너 많이 쫒아 다녔는데. 왜 답장 한 번을 안 해주고 그냥 무시했어?”
라고 우스게 농담처럼 툭 던지자, 그는 그저 어렸으니까라고 했다.
몇 번의 만남이 이루어 지고 친해진 뒤, 어느 날 카페에서 우리는 마주앉았다.
왠지 평소와는 다르게 쭈뼛거리고 망설이던 그는 나에게 냅킨에 뭔가를 끄적이더니 나에게 건냈다.
[우리, 만날래? 나 너 좋아하게 됐어.]
그렇게 신기한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만남을 그렇게 돌고 돌아 그와 갖기로 했다.
일주일간 그는 정말 나를 미치도록 이뻐해주며 쓰다듬어주고, 사랑해줬다.
처음 신태진 그와는 너무도 다른 태도로.
그는 너무도 남자스러웠고, 너무 듬직했다. 참 바르고 착하고 좋은 사람이란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다시 신태진 그에게 연락이 왔다.
너무 당황했던 나는 어이없어하고 있었고, 그에게 남친 생겼으니 꺼지라고 했지만 갑자기 학교 근처 카페로 나를 한 번만 제발 만나서 얘기 좀 들어달라고 했다.
너무도 매달렸고, 나 또한 너무 끝을 억울하게 끝낸 터라, 무슨 말을 떠들어댈지 궁금해서 결국 승낙해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형이, 내 대신 일부러 그렇게 모질게 말했어…. 내가 너무 아파하니까 형이 한 번에 떼려고 너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을 했대. 너무 미안해 하더라 형이…. 그리고 나 아직 너 좋아해. 그땐 너무 아파서 정신이 없고 예민해서 너한테 모질게 굴었어. 너무 미안해. 한 번만 용서해주고 다시 만나주면 안 될까?”
무릎까지 꿇어가며 눈물을 진짜 펑펑 쏟아내는 그를 보고 있자니 안 흔들릴 수가 없었다.
“하….”
그 말을 듣자 솔직히 나는 너무도 사랑해왔던 터라, 백퍼센트 흔들렸다. 그를 다 온전히 못잊었다. 사실, 현재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에게도 솔직하게 얘기했었다. 아직 그를 다 잊지 못했다며.
나는 심하게 흔들렸다.
바보같이, 그런 선택을 했다.
[미안해…. 아직 나 그를 못 잊겠어…. 너가 너무 좋은 사람인 거 아는데….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돼…. 정말 미안해….]
문자를 남겼다. 남자친구의 얼굴을 보고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철부지 어리석은 나이의 나였다.
그리고 이내 결국 눈물로 다시 신태진 그를 받아줬다.
그렇게,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그를 서울역에서 만나서 데이트를 했다.
“근데 너 오늘 화장 많이 떴다.”
아무 영혼없이 툭 내뱉는 그의 말. 그리고, 나는 크리스마스 기념 선물을 정성들여 못하는 뜨개질을 배워 목도리를 선물해주고 편지도 정성을 담아 건넸는데, 그는 전혀 생각 못했다며 크리스마스 선물조차 없었다.
그렇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쁘다기 보단, 뭔가 쎄함을 감지했다.
그러나, 그 기분이 그저 잘못된 판단이라 여긴 나는 또 다시 가볍게 흘려 보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의 짧은 데이트를 끝내고 그는 대전으로, 나는 다시 서울 집으로 헤어지고 그는 다시 연락이 없었다.
똑같은 잠수 이별을 두 번이나 나에게 반복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
나의 생일 1월 3일.
3일이 되는 새벽.
띠링-.
[미안해. 도저히 안 되겠어. 우리 그냥 없었던 걸로 하자.]
하….
두 번의 뒷통수였다.
그래. 그는 그저 나라면 금세 또 받아줄 걸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혼자 보낼 사람이 찾아지지 않자, 날 이용했던 것이다.
“미친새끼. 진짜 슈퍼트레쉬가 맞네. 하.”
내 생일도 알고 있던 그는, 굳이.
굳이.
내 생일이 되던 날 새벽에 또 다시 자기 할 말만 남기고 잠수 이별로 뒷통수를 치고 그렇게 도망갔다.
<회상 끝>
“이… 개새끼야!!!”
순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찾자마자 소리를 쳤다.
순간, 주변의 그렇게 시끌벅적했던 소리는 고요하게 멈췄고, 정적이 흐르고 이내 얼마 안 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신태진. 그는 고함을 치는 그녀를 쳐다보며,
“자…기야? 왜 그래? 누구한테 소리친거야?”
“너…. 너…!!!이 ******새끼야!!!”
‘자기…? 지금 날더러 자기라고 부른거야? 우웩…!!!’
그녀는, 과연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