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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날 Feb 11. 2023

소곱창의 추억

시차

  어떤 행동에 대한 반응은 시간이 한참 흘러 도착하기도 한다. 뒤늦게 돌아온 반응 덕에 멋진 그림이 완성되었다면, 나는 그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할 것이다.




  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이 날은 뜻밖의 제자들로부터 반가운 연락이 오는 날이기도 한다. J는 중학교 졸업 이후부터 매년 내 생일마다 연락을 해오는 제자이다. 4년 전 나와 사제동행 프로그램을 했던 제자이기도 하다. 사제동행 프로그램이란 말 그대로 교사와 학생이 함께하는 활동으로, 보통 담임 선생님과 학급 학생 몇 명이 팀을 이루어 상담, 교외 문화체험 활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다.


  정신없이 바쁜 학년 말, 나는 J를 포함한 3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 밖으로 나섰다. 첫 번째 일정인 방탈출 게임이 끝나고, 나는 아이들에게 먹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아이들이 고른 메뉴는 의외로 '소곱창'이었다. 소곱창은 지금도 내게 익숙지 않은 메뉴인데, 아마 그때의 나는 식당에 들어가기 전, 소곱창의 가격대를 가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음식이 나온 순간 나는 당황했다. 이미 할당된 예산을 초과해 소곱창을 주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양이 우리들의 배채우기에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음식은 금방 사라졌다. 우리는 마저 배를 채우고자 분식집으로 향했다. 분식집에서 나와 이만 아이들을 집으로 보내려는데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던 아이들이 내게 말했다.


  "핫도그 드실래요? 저희가 사드릴게요."


  나는 아이들이 아직도 배가 고픈가 싶어, 내가 사준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예상 밖의 이야기를 했다. 자기들 때문에 선생님이 소곱창 집에서부터 떡볶이까지 사비를 쓴 것이 죄송하다며, 본인들도 선생님에게 뭔가를 사주고 싶다고. 나는 중학생한테 얻어먹는 선생님이 어디 있냐며 한참 아이들과 실랑이를 했다. 김영란법 핑계도 대보고, 학년 부장선생님이랑 나왔으면 얻어먹었을 것 아니냐고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의지는 강했고 길거리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에, 나는 결국 아이들에게 핫도그를 얻어먹었다.




  잠시 사라졌던 이 기억은 J의 연락으로 인해 다시금 떠오르게 되었다. 올해 스무 살이 되어, 남들보다 일찍 직장 생활을 시작한 J는 나에게 생신 축하드린다며 커피 쿠폰을 보냈다. 그러면서 앞서 언급한, 4년 전 사제동행 프로그램을 했을 때의 에피소드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한 가지 약속에 대해 언급했다. J는 그때 소곱창 집에서 나중에 자신이 취업을 하게 되면 선생님께 밥을 사드리겠다는 약속을 했었다고 한다. 늦게 연락드려 죄송하다며 이제야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J의 말과 마음이 고마웠다. 그런데 J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J의 모습이 4년 전 그가 고입을 위해 썼던 자기소개서에서 꿈꾸던 자신의 미래 모습과 많이 닮아있어서 무척 신기하고도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그때 늦게까지 J의 옆에서 열심히 자기소개서를 봐주던 나의 모습은 조금 낯설기도 해서.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여러모로 짠순이가 되었다. 그때만큼 아이들에게 사비를 쓰지 않을뿐더러, 잘해줬다가 실망하고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마음에 보이지 않는 막을 치고 방어 태세를 갖춘, 마음의 짠순이가 되었다. 교사로서 맞이하는 여섯 번째 해인 올해, 나는 비담임을 소망했지만 실패했다. 익숙함과 고단함으로 인해 영혼 없이 새로운 아이들을 맞이할 뻔한 내게, J가 작은 기대를 품게 해 주었다.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도 돌고 돌아, 언젠간 몇몇의 아이들은 내게 예상치 못한 기쁨을 안겨 줄 것이라고. 그러니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언제 발아할지 모르는, 시차를 두고 예상치 못한 기쁨을 안겨 주는 씨앗을 위해 저축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일해보자고. 나도 시들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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