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과 틀림의 차이
세상에는 당연하게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 나에게 관심 없는 사람,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섞여 존재한
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는 이 당연한 이치 때문에 슬퍼하고 상처받으며 때로는 분노하고 기쁘기도 한다.
오늘은 이 당연한 일들로 당신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적는다. 한때 나 역시 이 문제로 지독하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나의 극복 과정이자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메시지이며, 지금 관계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당신이 언젠가 꼭 떠올렸으면 하는 이야기다.
잠시 편견 없이 이 소녀의 입장이 되어봐 주길 바란다. 한 소녀가 있었다. 온 가족의 지극한 사랑 속에 자란 아이. 세상 만물이 나를 사랑해 주는 줄로만 알았던 소녀는 자신감이 넘쳤고,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늘 따스한 사랑으로 가득했다. 이 소녀가 커서 아이돌이라는 꿈을 품고 15살이란 나이에 엔터테인먼트에 발을 들였다.
사랑만 먹고 자란 소녀에게 그것은 난생처음 마주하는 거대한 먹구름이었다. 소녀는 그저 이 먹구름이 금방 지나갈 소나기라 행각했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더 친절하고 밝고 예의 있게 행동하면 금세 나를 사랑해 주고 따듯하게 대해주실 거라 믿었다. 그래서 더 밝게 웃었고, 더 예의 있게 행동했다.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차가운 침묵과 불편하다는 표정, 타인 앞에서 습관처럼 내뱉는 무시, 그리고 인사조차 받지 않는 현실이었다. 이 소녀가 할 수 있는 건 상처받으면서도 애써 밝은 척, 괜찮은 척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게 있는지. 결국 소녀는 직접 찾아가 물었다.
“저를 왜 싫어하시나요?”
“아무 이유 없어. 그냥 너 같은 애들이 제일 싫어.”
“저 같은 애들이 뭔데요?”
“너처럼 가식적인 애들.”
소녀의 노력은 가식이라 불렀고, 속을 알 수 없는 애로 각인되어 있었다. 상처를 입은 소녀는 미움받고 싶지 않아 스스로 그 밝음을 멈췄다. 말을 줄이고, 모든 행동에 진심을 담으려 애쓰고 또 애썼다.
사람들은 그제야 이제야 네가 진심으로 행동하는 것 같다며 바라봐 주었다. 잠시 찾아온 그 온기에 소녀는 생각했다. 그래, 이 모습이 가식적이지 않은 나는구나. 그렇게 스스로를 지우며 1년이라는 시간을 버텼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상태가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가식적이란 무엇일까. 나는 매 순간 진심이었는데.’
고민 끝에 깨달은 것은,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서로를 밀어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쓰는 언어와 행동은 나의 가치에서는 진심이었지만, 그들의 환경과 가치관에서는 가식으로 번역되었을 뿐이었다. 반대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나에게 건네었던 차가운 태도, 불편한 표정, 그리고 무심한 무시들. 나에게는 상처였던 그 행동들 또한, 어쩌면 그들의 가치 안에서는 가식적이지 않은 가장 솔직한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며 나랑 다르다고 느껴지는 사람을 너무나 쉽게 틀렸다고 단정 짓곤 한다.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밀어내고 상처를 입힌다면, 그 관계는 서로에게 치명적일 뿐이다. 명심하자. 세상에 나의 가치와 기준에 완벽하게 똑같은 사람은 없다.
환경은 곧 나의 가치, 즉 기준을 만든다. 그리고 그 환경은 결국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살아가며 여러 번의 선택권을 마주한다. 당신이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 함께 있을 때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그런 관계를 선택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망설이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은 누가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인지 판단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나와 결이 맞는 사람을 선택하라’는 이야기다.
나 역시 이제는 안다. 웃음이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지닌 사람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며 가볍게 웃다가도, 어느 순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할 때, 나는 비로소 가장 나다운 상태가 된다.
나다울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자유이며, 동시에 깊은 행복이다. 혹시 지금 당신이 나와 결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면,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어보길 바란다. 그 사람과 있을 때 나는 편안한지, 어느새 장난스러운 아이 같은 모습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지, 그리고 이유 없이 더 주고 싶고, 아낌없이 베풀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를 말이다.
인간관계는 매우 섬세한 상호작용이라, 당신이 편안함과 행복을 느꼈다면, 그 감정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이 섬세한 연결을 두려워하기보다, 온전히 누려보기를 바란다. 그 안에서 당신이 더 많이 행복해지고, 그로 인해 삶의 에너지가 채워지기를.
타인의 말과 행동으로 상처받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상처받지 않는 사람도 없고,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더더욱 기억해야 한다.
세상은 결국 ‘나의 해석’으로 이루어진다. 내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밝아지고, 내가 부정적으로 해석하면 어느새 어두워진다. 방의 불을 켜야 공간이 밝아지듯, 세상 역시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 언젠가 다시 상처받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스스로 불을 켜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본질적으로 타인에게 큰 관심이 없다. ‘나’와 연결되어 있거나, 공통점이 있거나,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면 쉽게 시선을 두지 않는다. 만약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까지 관심을 쏟는다면, 그 자체로도 이미 지쳐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은, 어쩌면 상당한 에너지를 들여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때로는 감사한 관심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살아가며 우리가 쓰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며 써야 할 곳들은 너무나도 많다. 학업, 업무, 연애, 취미 등 우리가 사랑하고 신경 써야 할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그를 다른 곳에다 쓰기엔 너무나도 아깝지 않은가.
그리고 싫어하는 감정 역시 결국 나를 소모시키는 감정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니 누군가 때문에 나의 감정을 망치지 않았으면 한다. 그 에너지를,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더 많이 써주기를 바란다.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깊게 스며든다. 이직, 거리두기, 독립, 혹은 관계의 정리. 어떤 방식이든 괜찮다. 거리를 두어라. 중요한 건, 나를 지키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을 나 또한 그렇게 선택해 왔다. 떠난 자리는 당신이 선택한 사람들로 채워지고, 그 관계들은 당신의 삶에 훨씬 더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가지 않아도 된다.
우리 모두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들과 살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