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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인류의 미래는 이미 정해졌다.

by 나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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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


당신은 어떤 소설을 좋아하는가? 보통 소설하면 떠오르는 카테고리는 스릴러, 성장, 로맨스 등인 듯하다. 대부분의 잘 팔리는 소설들은 장편 소설이며 우리가 흔히 접하는 책들도 200페이지는 그냥 넘어간다. 글이 길어지고 묘사가 많아질수록 이야기가 깊어지기 때문일까? 내가 독후감을 썼던 책 중에서도 '원숭이의 손'을 제외하면 모두가 장편 소설 혹은 장편 에세이에 속한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꽤나 신선했다. 10대 시절 이후로 처음 읽어보는 단편 소설집이었다. 7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짧은 책 속에 세 가지 이야기가 나뉘어 담겨있다. 제목도, 표지도 책 내용에 대한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첫 소설 '깃털'은 아주 먼 미래의 장례 문화를 그리며 주인공 조에와 그의 로봇 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평소 SF 소설 및 영화를 매우 즐겨보는 편인데, 그 이유는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날카로운 통찰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확자 시리즈'에서는 영생에 대한 문제점과 유토피아의 허점을, 오늘 본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우리 삶의 허무주의를 신랄한 분석을, 이 글에서 이야기해 볼 소설 '깃털'은 지구 온난화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또 다른 문제점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지구 온난화라는 말을 들으면 생각나는 것은 무엇인가? 더위, 북극곰, 해수면, 곤충, 기온... 나는 이러한 키워드가 떠오른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모두가 비슷한 아이디어를 떠올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김혜진 작가는 달랐다. 그는 에 초점을 맞췄다.


따뜻해진 계절 덕에 새들은 더 이상 이주하지 않는다. 쓰레기 매립지에서 먹이를 찾고 도시의 고층건물을 나무 삼아 시간을 보낸다. 새들의 무분별한 번식과 오염된 환경 때문에 심각한 조류독감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인간은 새들을 대신하여 이주할 곳을 찾아 이곳저곳 떠돈다.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환경을 찾아 나서지만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조에는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이다.

죽은 이들을 기리는 방법 또한 이전과는 달라졌다. 인간은 이제 깃털을 남기고 떠난다. 살아 있는 자들은 그 깃털을 통해 죽음을 기리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는다. 조에는 자신의 로봇 새를 통해 이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만, 끝내 그것이 과거의 장례 문화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이 소설을 읽으며 김혜진 작가가 얼마나 날카로운 시각으로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지 느낄 수 있었다. 환경 문제는 이제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을 요소가 되었다. 나는 평소 SF 작품을 좋아하지만, 대개 거대한 세계관 속에서 인류 전체를 조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깃털'은 한 개인의 일상, 장례문화를 통해 인류가 맞닥뜨린 변화를 보여준다. 이는 거시적인 이야기보다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특히,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세상이 변해간다면, 우리는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지만, 변화의 속도가 우리의 수명을 넘어설 정도로 빠르다면 어떤가? 그리고 그 변화가 우리가 애써 부정했던 환경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두 번째 작품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는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던 이야기이다. 짧은 소설이지만 그 메시지가 강렬하게 남아 내 머릿속에 하나의 그림처럼 남아있다. 여기서 TRS란 돌보미 로봇을 뜻한다. 묘사된 내용에 의하면 스크린 속 보호자와 같은 얼굴이 띄워져 환자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도록 디자인된 휴머노이드인 듯하다.


이 소설은 '돌봄'이라는 행위를 둘러싼 질문을 던진다. 과연 돌봄이란 무엇일까? 돌봄을 받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신체적 보살핌일까, 아니면 정서적 교류일까? 소설 속에서 TRS는 인간을 돌보는 역할을 하지만, 그 행위가 진정한 돌봄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TRS는 환자를 씻기고, 식사를 챙겨주며, 약을 시간에 맞춰 복용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작 환자의 감정과 존엄성은 배제된다. 기계적인 응대와 반복적인 질문이 쏟아질 뿐, 인간적인 교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TRS가 환자의 정서적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다. 환자가 외로움을 호소해도 TRS는 단순히 프로그램된 답변만을 반복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점점 증가하는 자동화된 돌봄 시스템에 대한 경고처럼 느껴졌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점차 돌봄을 기계에 의존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조차 매일같이 챗 GPT에게 조언을 구한다. 하지만 기계는 인간의 온기와 공감을 대체할 수 없다.


"제 선택이 하느님의 뜻이라면요?"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이미 하느님께서 뜻하신 생명은 끝이 났는데 인공호흡기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거라면요?"
"그래요. 그런 상황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로봇이 그럴 수는 없는 거예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다면서 어떻게 제게 '하지 말라'라고 하시는 겁니까. 하느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하느님을 믿는단 말입니까. (이하 생략)"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중


결국,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는 돌봄의 의미를 되묻게 하는 소설이다. 우리는 돌봄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리고 미래의 돌봄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이 짧은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


마지막 '백화'는 현재 인류가 정성스레 꾸며놓은 디스토피아에서 미래의 인류가 고통스럽게 생존해나가는 일대기이다. 작가의 섬세한 묘사에 읽는 내내 입에서 바닷물의 짜고 떫은맛이 느껴졌다. 이 책을 덮고 나면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이 과연 '발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퇴보'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백화' 속 인물들은 바다가 삼켜버린 땅 위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물에 잠기지 않은 좁은 공간과 희미한 생존의 의지뿐이다. 이들은 폐허가 된 세상을 헤매며 먹을 것과 쉴 곳을 찾지만, 희망은 점점 옅어져 간다. 인간이 만들어낸 오염과 파괴 속에서, 그들은 더 이상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다. 익숙한 세상이 사라진 자리에는 소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작가의 묘사 방식이다. 단순한 환경 파괴의 경고를 넘어, 인물들이 겪는 절망과 무력감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독자는 그들의 눈을 통해 황폐해진 풍경을 보고, 짠 내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생존을 위한 사투를 직접 경험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백화'는 그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이미 우리 주변에서도 곳곳에서 기후 변화의 경고가 울리고 있다. 바닷물은 점점 높아지고, 우리는 익숙한 환경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이 소설이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우리가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백화' 속 세계가 곧 우리의 현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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