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내 말 좀 믿어줘.
착실하게 세뇌당한 나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었더랬다. 천국에 가고 싶었던 나는 중학생 어린 나이에 피아노 반주 봉사를 시작했다. 중학생이 된 이후로 우리 교회는 이사를 했다. 새로운 건물에 모든 것이 커다랗고 반짝인다. 내가 새로 예배를 드리게 된 장소는 넓고 따뜻하다. 서른 개도 넘는 의자가 준비되어 있고 푸근하고 깨끗한 새 방석이 잔뜩이다. 신발장도 아주 커서 이젠 신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새로 만난 언니 오빠들과 대화를 하고 엎드려 휴식하고 피아노를 치며 놀기도 한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하지만 피아노 반주에 대해서는 아직 초보이다. 우리 예배실에서 학생들을 도와주는 남선생님 한 명이 나에게 제안한다.
"나윤아, 혹시 피아노 반주 쌤이 가르쳐 줄까?"
"아, 그럼 감사하죠. 오늘요?"
"그래, 오늘. 그럼 예배 마치고 잠깐 남아!"
평소에 싫어하던 사람은 아니지만 묘하게 불편한 느낌이 있는 선생님이다. 표정이 어색하고 뭔가 로봇 같으며 함께 대화를 나누기 쉽지 않은 상대이다. 뭐 그래도 잘된 일이 아닌가 하며 다시 성경책으로 눈을 돌린다.
신시사이저는 건반의 색이 오묘하게 투명해서 보는 재미가 있다. 그랜드 피아노나 일반 피아노랑은 다르게 반질반질하고 가벼운 플라스틱의 촉감이 즐겁다. 이런저런 버튼을 누르면 소리도 종류도 천차만별로 바뀐다. 드럼, 비트, 기타, 오르골 등등 재미있는 것들 투성이다. 이제 반주를 배우면 이 피아노를 내 것처럼 마음껏 쓸 수가 있다.
"자, 이제 이 코드를 보고 쳐보자."
"..."
"아니, 그렇게 말고 이렇게."
"..."
"아 그렇게 말고! 손가락을 더 벌려야지! 아니 아니 그게 어렵나?"
"네..."
"하... 왜 그렇게 해 그걸! 다시 해봐."
30분 남짓의 짧은 피아노 강습이 끝났다. 식은땀이 뻘뻘 난다. 선생님은 어딘가로 가버렸고 나는 피아노 앞에 홀로 남아 우두커니 앉아있다. 고등학생 언니들이 내 모습을 보더니 걱정이 되었는지 다가온다.
"나윤아, 괜찮아? 표정이 안 좋아. 무슨 일 있어?"
한참을 울었다. 너무 서러웠다. 나는 그저 피아노를 배운 중학생이다. 대회 수상자도 음악 천재도 아니다. 아직까지 그의 이름과 말투, 표정을 선명히 기억한다. 그리고 너무나 속상한 나머지 집에 도착해 엄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나는 엄마에게 다정한 위로의 말을 간절히 바랐다.
"뭐? 신태가 그랬다고? 걔가 그럴 애가 아닌데. 참 이상하네. 네가 잘못 들은 거 아니니?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신태는 너를 도와주려고 그런 거잖니. 이해해라."
"..."
예상했던 반응. 이래서 엄마에게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고 싶지가 않다. 내 말을 믿기는커녕 제멋대로 해석해 버린다. 내가 화를 내면 또 화를 낸다고, 울면 또 운다고, 속상해하면 또 예민하게 군다고 나의 감정을 재단한다. 왜 엄마는 딸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까? 왜 내가 하는 말을 믿어주지 않을까? 내가 믿을만한 사람이 아닌 걸까? 나의 감정에 솔직해지면 그건 예민하게 구는 건가? 20대 중반의 성인 남성이 갓 중학교에 입학한 십 대 여자아이를 울렸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엄마라는 이유로 나를 믿어주기엔 내가 너무 못 미더운 걸까. 오늘도 나는 입을 닫는다.
***
오늘은 엄마와 함께 여행을 가는 날이다. 남해로 떠난다. 내가 요새 스트레스를 받아하는 것 같다나 뭐라나. 즐거운 기억을 많이 만들고 오자는 엄마에 말에 신나는 마음으로 짐을 싼다.
차를 타고 이곳저곳 누비며 먹을거리를 사고 구경을 다닌다. 이제는 모래사장을 사륜 오토바이로 누빌 예정이다. 모래사장에 도착하자 불량해 보이는 아저씨들이 여럿 보인다. 모두가 두건을 두르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입에 뭔가를 쑤셔 넣으며 우리에게 말을 거는 비쩍 마른 아저씨 한 명이 오토바이를 세워 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나와 엄마가 탈 오토바이는 각자 다른 곳에 위치했다. 엄마의 오토바이는 저 멀리에 있다. 그 아저씨는 엄마에게 오토바이 타는 법 설명을 끝마치고 나에게로 다가온다. 나는 오토바이 위에 얌전히 앉아 차례를 기다린다.
"자 이 버튼이랑 이 손잡이로 조절하는 거예요. 알겠죠?"
설명을 길게 늘어뜨리는 척을 하며 아저씨는 팔꿈치로 나의 가슴을 노골적으로 건드린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지만 오토바이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나는 어찌할 방도가 없다. 이 상황에서는 대체 어떤 대응이 정답일까? 냅다 소리를 지르는 것? 상대방의 눈을 보고 상황에 직면하는 것?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 상상은 늘 즐겁다. 하지만 중학생의 나로선 그 상황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 사륜 오토바이가 재밌었는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역겹고 더럽고 추악한 기분만이 남는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는 사륜 오토바이를 타지 않았다.
"아까 저기에서 오토바이 가르쳐주던 아저씨가 내 가슴을 팔꿈치로 만졌어."
"... 사실 그 아저씨가 나한테도 그랬다."
"뭐? 그럼 경찰에 가야지, 엄마."
"저 사람도 불쌍한 사람이야. 얼마나 외로우면 그랬겠니. 나중에 천벌 받을 거야."
"..."
나는 오늘 엄마와 함께 성추행을 당했다. 엄마는 가해자를 감싸고돌았다. 그 인간이 불쌍하단다. 중학생 나이에 성추행을 당한 나는 불쌍하지 않은가 보다. 본인의 인생은 불쌍하지 않은가 보다. 그리고 그 남자는 지금까지도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것이다. 다른 소녀들의 가슴깨를 만지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