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 러브, 좀비.

차가운 환상, 따뜻한 절망.

by 나린글
칵테일, 러브, 좀비.jpg

별점: ★★★★★


조예은 작가를 접하게 된 두 번째 소설, 그 이름도 특이한 "칵테일, 러브, 좀비". 그 이름에서 끌림보다는 부담감이 더 컸던 것 같다. 조예은 작가의 글이 모두에게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힐 수 있는 내용은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는 판타지 장르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내용들을 다룬다. 유령, 괴물, 미신, 좀비 등 일상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을 법한 이야기를 한국적 시선과 배경을 통해서 독특하게 풀어낸다. 지난번 읽었던 "트로피컬 나이트"를 통해 어느 정도 작가에 대한 파악을 마친 나는 꽤나 즐겁게 소설을 끝낼 수 있었다.


책은 총 네 가지 단편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대", "늪지의 사랑", "칵테일, 러브, 좀비", 그리고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각자 특색이 분명하고 글이 주는 이미지가 또렷해 다양한 상상을 해보기 좋았다. 책의 이름처럼 단연 주인공이 되는 단편은 "칵테일, 러브, 좀비"일 것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을 끌었던 건 책 맨 마지막에 실린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였다. "트로피컬 나이트" 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건 마지막 이야기였는데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야기는 주인공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허무하게 살인 당하며 시작된다. 곧이어, 악마인 지 천사인 지 모르겠는 것이 주인공에게 다가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세 번 주겠다며 킥킥 거린다. 그리고 시점이 전환되어 어떤 여성의 스토킹 일지로 이야기가 계속된다. 마치 현실과 환상, 현재와 과거, 관찰자와 피해자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듯 어지럽게 흐르면서도 글은 끝내 그 퍼즐을 맞춰간다.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확신할 수 없는 장면들이 많았다. 무엇이 진실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가해자가 누구인지조차 모호한 감정의 흐름 속에서 나는 오히려 현실의 여러 단면들을 본 것 같았다. 시간이라는 건 한 번 흐르면 되돌릴 수 없다는 절망감, 하지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바로잡을 수 있을까에 대한 불신, 그리고 결국 반복되는 선택과 파멸. 이야기의 결말은 말 그대로 칼로 자른 듯 매끄럽지만 날이 서 있었다. 감정적인 위로가 없는 엔딩이어서 더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조예은 작가의 세계는 언제나 낯설다. 그런데도 자꾸 다시 찾게 되는 이유는 그 낯섦 속에서 자꾸 현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괴물 같은 상황, 도망칠 수 없는 과거, 반복되는 고통. 어쩌면 좀비보다도 훨씬 더 괴이한 것들이 우리 일상 속에 있다는 걸 작가는 다르게, 기묘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뜨끈한 피로 우리의 마음을 녹여주는 듯한 이야기들. 차가우면서도 다정함이 깃든 그의 시선은, 불편하면서도 강하게 나를 끌어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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