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아줌마의 불안증 투병기 15
병원 상담을 다닌다고 하면,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은 "왜?"이다.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특정한 사건이나 사고에 연유한 트라우마가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이트 역시 어릴 적 트라우마가 무의식에 잠식해 있다가 의식으로 올라와서 병적 증상을 일으킨다고 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담당 선생님도 무의식 속 트라우마를 찾고자 노력하신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7살 때 성폭행 직전에 탈출한 사건 때문? 시험에서 틀린 수만큼 엄마에게 맞아서? 10살 때 거짓말하고 악써서 엄마에게 피멍이 들 때까지 맞아서? 혼날 때마다 불 꺼진 화장실에 갇혀서? 유아원 때 아파트 복도에 쫓겨난 적도 있고, 6학년 때 엄마가 돈 안 가져다준다고 담임선생님께 뺨 맞고 나가떨어진 적도 있다. 5학년때는 따돌림도 당했고, 중고등학교 때는 입시스트레스에 숨이 막혔다. 이렇게 간단히 나열하니, 불안증이 생길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혹자는 이보다 더 힘들게 산 사람도 많아! 아니면 어릴 적에 안 맞고 자란 사람이 있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힘들었던 이런 일들 외에 꽤 여유 있게 살았다.
부모님은 공부한다고 하면, 뭐든 사주시고 지원해 주셨다. 심하게 규칙을 준수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 덕분에 항상 선생님들께 이쁨 받는 학생이었다.(6학년 때 그 X 빼고는) 최고는 아니어도 입시하는 내내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고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기도 했다. 따돌림당했던 것도 사실 담임 선생님이 나만 편애하고 미술대회 나가서 언니들도 제치고 제일 높은 상을 받은 게 원인이기도 했다. 사춘기를 심하게 보냈지만, 아빠는 바쁜 와중에도 등하교를 시켜주시면서 이런저런 얘기 들어주기도 하셨다. 그리고 초6부터 고3 때까지 그림 그리면서 입시하느라 많이 힘들었지만, 비록 입시미술이어도 그림그릴 때는 모든 것을 다 잊고 행복했다. 등등... 사실 좋은 게 훨씬 많았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이 점에서 담당 선생님은 더 깊이 잠식되어 있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 하신다. 그런데 사실 요즘 조금 회의적이다. 찾아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찾는다고 행복해질까? 극적으로 불안이 평안으로 돌아설까? 하고 말이다. 그러다 한 유튜브를 보게 되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을 맞출 수는 없겠지만 보면서 몇 가지 나의 불안의 원인에 대한 상념이 들었다.
# 어린 시절 엄마는 "너 잘 되게 하려고 엄하게 하는 거야!"라고 공공연히 말씀하시며, 애써서? 엄하게 대하셨다. 잘못하면 구둣주걱로 맞는 게 대표적인 거였다. 그래서 자라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엄마에게 말하기 힘들었다. 어떤 것이 맞을 일인 지, 혹은 이해받을 수 있는 일인 지 구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 순간 그냥 참는 법을 길렀던 거 같다. 그래서 지금도 참는 거는 진짜 잘한다. 물론 간혹 참다가 폭발하기도 하지만... 그런데 이렇게 나의 감정이나 감각(아파도 혼났다)을 억제만 하고 다루거나 수용되는 경험이 적다 보니 스스로 가짜 감정을 가지고 사는 데에 익숙해진 거 같다. 그래서 매 순간 여전히 불안한 게 아닐까?
# 담당선생님이 내가 불안이 커지는 경우에 대해서 "예기불안"을 키운다는 점을 말해주신 적이 있다. 어떤 상황이나 상대의 표정 등을 보면서 미리 불안을 상상한다는 거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나를 쳐다볼 때부터 표정이 안 좋으면 나는 자동적으로 '내 옷차림이 별론가?' '만나자는 약속을 했을 때 내가 놓친 게 있었나?' '오늘 나오기 싫었는데 억지로 나온 걸까?' 등등 짧은 순간에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살피면서 상대가 기분이 별로인 이유가 나인지를 계속 찾으려 한다는 거다. 그러니 불안이 계속 높아지기만 한다는 거다. 사실 상대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살짝 찡그렸거나 그냥 속이 안 좋은 거였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제 이러한 예기불안이 아무 의미 없으며, 오히려 나의 불안도 키우고 누군가와의 관계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래서 안 하려고 하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잘 멈춰지지가 않는다. 그러면 왜 이러는 걸까? 그냥 내 생각엔 어린 시절 잦은 전학(직업상 전근이 많은 아버지의 직업으로 인해서)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고, 그때마다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게 아닐까 하는 추정도 할 수 있을 거 같다. 혹은 내 감정을 온전히 누군가가 받아들여준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다.
실상 일 년 반 전만 해도 내가 불안이 높은 지 몰랐다. 엄밀히 말해 다들 그러고 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불안하다는 것을 알고 보니 안 그런 사람들 혹은 그간 신기하고 부러웠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차이점이 조금 알 거 같기도 하다. 불안의 이유를 찾으려 하는 것도 역시 그 이유를 알고 치유를 해야 할 거 같은 불안감 때문인 거 같다. 그래서 매 순간 머릿속은 전쟁터이기도 하다. 그래도 뭔지 알 수 없었던 감정이나 감각으로 힘들었던 시간들보다는 지금이 낫다. 혹시 불안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멈춰서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간 저질러왔던 실수들에 자책을 하느라 더 힘들었다면, 이제는 '그럴 수 있지'라며 스스로를 토닥이고 실수를 덜 하기 위해서 템포를 조절하는 법을 조금은 알 수 있다. 여전히 예전처럼 불안해하며 질주했다가 실수하기도 하긴 하지만 말이다.
결국 그 이유를 찾는 과정도 쉽지 않을 것이며, 이유를 찾는 와중에도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나를 다독이며 살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