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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튜디오 포카 Apr 11. 2020

인왕산에 오른 날

2020. 01. 23(목)

포근한 날이었다. 포카를 산책시키러 나갔다가 마음에 바람이 들어 돌아왔다.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날씨다! 나는 무작정 백팩을 꺼내 물을 가득 담은 텀블러와 사과 한 알, 귤 두 개를 챙겨 뒷산에 천천히 올랐다. 걷다가 너무 힘들면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는데 천천히 오르다 보니 산 정상이더라. 임신한 후로 운동을 쉬었는데 오랜만에 땀을 흘리니 기분이 꽤 좋았다. 정상에서 서울의 경치를 구경하며 땀을 식혔다. 사과도 귤도 참 달았다.



성곽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는데 같은 길을 따라 올라오고 계셨던 한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어느 방향에서 여까지 올라온 거냐고 물으셨다. 홍제 쪽에서 올라왔다고 답했더니, 그쪽에서 오는 사람들이 많길래 궁금해서 물으셨단다. 그분은 종로구 쪽에서 오시는 길이었는데 홍제 쪽보다 종로에서 올라오는 길이 더 험하고 가파르더라. 할아버지는 내 등 너머로 올라야 할 길을 쓱 훑고는, "수고해요"하고 다시 걸어가셨다. 나는 어르신의 그 말이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수고해요.



나는 예전부터 개미마을에서 기차바위를 넘어 성곽길을 따라 종로구로 내려가는 탐방코스를 꼭 걸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걸 만삭일 때 경험하게 될 줄이야! 무사히 잘 다녀와서 기뻤지만, 사실 정상에서 갑자기 진통을 겪거나 하면 어쩌나 싶어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걷기도 했다. 사무실에서 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받은 토토는 내가 몹시 걱정이 되었지만, 걱정하는 티를 내면 모처럼 바람 쐬러 간 내가 불편해할 것 같아서 조심히 잘 내려오라고 애써 말했단다. 나도 토토가 그럴 것 같아서 완만한 길에 도착했을 때 잘 도착했다고 바로 연락했다.



종로구에 도착했으니 '사직동 그 가게'에 들려 카레를 먹어야 했다. 치킨 카레를 주문했는데 옆 테이블의 손님이 주문한 시금치 카레에도 눈이 갔다. 주문을 바꿀 수도 있었지만 언젠가 토토, 마꼬와 함께 이 짧은 모험을 함께 하고 싶어서, 그 날의 메뉴로 남겨두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선 경복궁역까지 천천히 걸었다. 세검정으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 앞 두부 전문점에서 뽀얗고 실한 두부 한 모도 샀다. 집에 가서 파를 잔뜩 썰어 넣고 두부조림을 해야지. 토토가 전부터 먹고 싶어 했던 소고기 뭇국에도 조금 썰어 넣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그전에 반신욕을 하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만족스러운, 나른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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