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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튜디오 포카 Mar 21. 2024

지기 위해 달리는 마라톤

숨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이제 고작 2KM를 넘겼나. 아직 절반도 달리지 못했는데 호흡이 가쁘다. 초반에 마킹해 두고 뒤를 따라 달리던 키가 큰 아저씨는 출발선부터 몸풀기를 위한 워밍업이 끝났는지, 점점 속도를 올리더니 사람들 틈으로 가뿐히 사라져 버렸다. 실력이 뛰어난 분과 내 페이스가 맞다고 생각했던 게 오산이었다. 어쩐지... 체형이 마라토너의 체형이긴 했다. 무작정 그분을 쫓아가다가는 7KM 이전에 체력이 다 바닥날 것 같았다. 어쩌면 이쯤에서 헤어지길 다행이었을지도.


지난주 10KM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려고 모인 사람들은 2만여 명. 달리면서 수많은 참가자들을 유심히 관찰해 본다. 달리는 폼과 자세, 러닝화는 어떤 색상인지, 어떤 상의를 입었는지, 휴대폰은 어디에 두었을지... 등등. 이만큼 다른 사람에게로 시선이 향해있다는 것은 이번 러닝이 벌써부터 힘들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 번 시선이 타인에게 꽂혀버리면 다시 나에게 집중하기는 어려워진다.


보통 마라톤 대회에 나가면 경쟁심과 분위기에 휩쓸려 평상시보다 기록이 5분 정도 단축된다. 하지만 그날은 그보다도 더 많은 애를 쓰고 있었다. 그렇게 애를 쓰고 있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 갔다. 나이불문, 기력이 창창한 사람들을 보며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평소에도 이 정도로 연습했을 테니까. 30초 동안 달리기 조차도 어려웠던 내가, 1년 만에 10KM를 쉬지 않고 걷게 된 것도 큰 변화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기록에도 조바심이 난다. 사람의 마음이 이만큼 간사하다. 욕심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그림 그리는 일상을 살고 싶다는 다짐으로 프리랜서의 삶을 선택했는데, 인터뷰와 출간 등으로 이름을 알리는 주변 작가들을 보며 애를 태웠던 시기가 있었다. 그분들의 출발점이 어디였는지, 어디에서 어떤 속도로 연습을 해왔는지도 모르면서 나를 앞질러 간다는 현재의 상태만 생각했다. 조급한 사람은 태가 난다. 그래서 나는 늘 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달리기는 대게 운동한 만큼 실력이 향상된다. 그래서 마라톤에 나갈 때마다 자신의 실력을 그냥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매주 2-3회가량 요일을 정해두고 달리는데, 몸이 가벼워 잘 달리게 되는 날도, 꾸역꾸역 뛰게 되는 힘든 날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날들이 차곡차곡 쌓여 걷지 않고도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기록은 지난가을 대회를 끝으로, 목표했던 것 이상으로 잘 나왔다. 겨울 동안 쉬지 않고 달렸던 일에 대한 보상과 같다. 하지만 무리해서 달린 후유증으로 며칠 후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야 했다. 엑스레이도 찍어보는 호사를 누렸는데, 의사 선생님의 말로는 러닝에 알맞은 발 모양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달리실 거지요?"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왔다.


앞으로도 계속 홍제천을, 여의도와 상암을, 잠실을 달릴 것이다. 서울의 어디선가 숨이 턱까지 차올랐음에도 주변을 관찰하며 달리는 욕심 많은 얼굴의 사람을 보게 된다면 달리는 일의 의미를 깨우치기 위해 마음을 단련하는 중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다. 이번주에도 달릴 예정이다. 언젠가는 잘 지기 위해서.

나는 지기 위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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