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동안 제주도에 머물고 있는 지인과 한라산에 다녀왔다. 하룻밤만 자고 다음 날 저녁에 돌아오는 일정임에도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제주에 엄마 혼자 다녀올 거란 말을 듣고 서운해했다.
“엄마 등산만 하고 올게. 지금보다 더 형님 나이되면 그때는 우리 꼭 산에 같이 다니자.”
의외로 아이는 등산만 하러 간다는 말에 보채지는 않았다. 지난가을에 아이와 단 둘이 북한산 인근의 카페에 갔다가 등산로 초입까지 걸어본 일이 있다. 해가 져물어 갈 때쯤이라 사방이 금방 어둑해졌는데 그게 무서웠는지, ‘엄마, 우리 저기는 다음에 가보자’고 했던 일을 잊지 않았나 보다. 다만 엄마 혼자 다녀오는 대신에 선물로 키링을 사 오라는 임무를 내려줬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임에도 읽을 책 한 권을 챙겼다.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는 안미옥 시인님의 <조금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를 읽으며 아이의 어렸던 시절을 떠올렸고, 종달리의 한 서점에서는 김소영 작가님의 <어떤 어른>을 구입해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읽으며 아이의 미래 모습을 그려보았다.
서울과 제주를 이동하며 읽은 문장과 마주친 장면들에서 나는 우리 집에 있을 아이를 떠올렸다. 아빠 품에 안긴 아기의 통통한 볼을 봤을 때, 한라산 대피소 안에 앉을자리가 없어 아쉬워하는 어린이의 표정을 마주했을 때, 매서운 찬바람에도 끄떡 않는 푸른 아기 고사리를 발견했을 때, 휴대폰 게임에 푹 빠진 어린이의 굽은 등을 살폈을 때, 사려니 숲길을 걷는 가족의 꼭 쥔 손을 봤을 때, 아기띠에서 잠든 아기의 앙증맞은 발을 보았을 때, 식당에서 아빠와 조잘조잘 이야기 나누던 어린이의 들뜬 목소리를 들었을 때, 산정 호수의 반짝이던 윤슬을 보았을 때에도. 그리고 아주 조금은, 키링을 사 오라는 말에 곧바로 안아주지 않았던 일을 떠올리며 후회했다.
제주 공항에 도착해 탑승 시간을 기다리며 아이랑 영상 통화를 했다. 사실 하루종일 유치원 등하원과 업무, 포카 산책까지 모조리 담당해 준 남편이 걱정되어 전화를 건 것이었지만, 영락없이 아이가 끼어들었다.
“엄마, 지금 어디야?”
“응, 엄마 지금 공항인데 곧 출발해. 비행기에서 내리면 집에 빨리 가려고 택시 탈 거야. 우리 조금 있다가 만나자.” 면세점과 탑승구 사이에 북적이는 인파로 정신이 없어서 끝인사로 통화를 마치려던 찰나, 내 마음과는 다르게 아이는 “엄마, 근데…”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키링을 보여달라고 했다. 엄마가 자기와 떨어져 있는 동안 자신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는지, 아니 자기를 잊어버리지는 않았는지 궁금했나 보다. 나는 재빨리 가방 짐을 풀러 영상통화 화면으로 의기양양하게 키링을 보여줬다.
“마음에 들어, 엄마 고마워.”
작은 원통형 플라스틱 안에 손톱만 한 한라봉 피규어와 반짝이 글리터가 들어간 다소 조잡해 보이는 키링이었지만, 아이는 마음에 들어 했다.
언제나 집 열쇠도, 차키도, 지갑도, 때로는 등원하는 길에 당연히 챙겨야 했을 어린이집 가방도, 여행 바로 전 날 곤드레 밥집에서 결제 후 주머니에 넣어둔 신용카드도 잃어버리고(스산하게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아이랑 우산을 쓰고 카드를 찾으러 성수동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제주행 비행기도 놓쳐버려 남편에게 속상함을 전했는데 곁에서 듣던 아이는 휴대폰 너머로 “으이그~”라고 작은 탄성 소리를 내었다. 이렇게나 못 미더운 엄마가 과연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킬지… 어쩌면 간식을 먹을 때나 유치원에서 친구와 놀 때도, 아빠랑 저녁을 먹을 때에도 줄곧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링을 사 오라는 미션은 수행했으니, 아이의 서운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길.
집에 도착하니 포카가 인형을 물고 뛰어나와 반긴다. 고요한 적막감에 조용히 방에 들어가 보니 아이도, 육아로 지쳤을 남편도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다. 내일 아침, 아이가 일어나면 꼭 안아줘야겠다. 매 순간순간마다 보고 싶었다는 말도 잊지 않고 꼭 덧붙이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