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집을 나갔다. “팔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며 결혼반지를 놔둔 채. 나와 네 살배기 아들을 두고 감히 집을 나갔다는 따위의 배신감은 없었다. 절혼(絶混)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다음 날 점심을 먹은 후, 아들과 함께 고향인 부산으로 갔다. 나의 일정에 대해 시시콜콜 동의를 구하는 과정은 내 인생에서 이제, 생략 가능이다. 곧장 친정으로 가는 대신에 광안리로 향했다. 결혼을 두 달 앞두고 파혼한 친구와 조우하기 위해서이다. ‘절혼녀’와 ‘파혼녀’의 만남이라니,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비 오는 오후 네 시의 광안리 바다를 바라보며 우리는 조개를 구웠다. 소주와 맥주의 황금비율을 논하던 대화는 이내 ‘결혼의 패악질’로 이어졌다. 어제 절혼을 한 내가 결혼을 미처 채 하지 못한 그녀에게 한 수 일러주어야 할 것 아닌가.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서둘러 마무리하는 동화는, 결혼의 민낯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했다. 친구들은 나를 보고 “부모님이 이혼한 애처럼 안 보여”라는 애매한 칭찬을 건네기도 했다. 엄마의 부재는 입시 성적에 맞는 대학교부터 전공 선택, 졸업 후 진로, 면접, 취업, 상경, 퇴사, 결혼 등 인생의 크고 작은 과업들을 100퍼센트 나의 선택으로 살게끔 만들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나를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주었고, 후회가 적은 인생을 살게 했다. 한 지인은 이런 나의 살아온 나날들에 대해 듣고는 “담금질을 많이 해서 현명해졌다”라고 했는데, 사회에서의 나를 규정하던 어떠한 언어들도 결혼 생활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이 세계는 내가 알던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저쪽 세계에서의 ‘나’와 이쪽 세계에서의 ‘나’는, 다른 ‘나’를 필요로 했다.
임신 초, 심한 감기에 걸린 적이 있다. 약을 먹지 못하는 임산부라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침을 하며 견뎌야 했는데, 그때 신랑이 레몬차를 끓여 내왔다. 임신과 출산 내내 식사는 신랑 전담이었다. 혹여나 굶을까 봐 퇴근을 하고 와서는 계란말이며, 생선구이며, 밑반찬을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뒀다. 출산을 한 후에는 한 달 내내 미역국을 끓여냈다. 아이가 가벼운 기침을 할 때면 머리맡에 양파를 썰어서 놔둔다거나, 계란 노른자에 참기름 한 방울 떨어트리고 꿀을 타서 먹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신기한 광경이었는데, 이 같은 그의 자상함은 모두 어머님에게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오랜 기간 혼자 지내온 나는 결코 누려보지 못한 살뜰한 챙김. 그러나 그의 키워드인 ‘안정’, ‘보살핌’, ‘챙김’은 날이 갈수록 내게 ‘압박’, ‘구속’, ‘억압’이라는 오류로 입력되었다.
바닷가에서 친구의 빈 잔을 채워주며 나는 분개했다. “신랑은 나한테 맨날 ‘여보, 구두 사야 돼’, ‘여보, 비타민 떨어졌어.’ 왜 그걸 일일이 나한테 얘길 하냐고?” 신랑은 영양제 하나 챙겨주는 게 가족이고 사랑이라고 믿는다. 처음 몇 번은 의식적으로 해보려 했지만 천성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신랑은 내가 ‘아내’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 생각했고, 나는 본인이 필요한 건 본인이 가장 잘 아는데 왜 그걸 타인의 손을 빌리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신랑이 결혼반지를 뺀 그날, 불 좀 끄라는 신랑의 고함은 현상일 뿐이었다. 본질은 따로 있었다. 며칠 째 본인이 셔츠를 다림질하고 있다는 사실이 케어 받지 못한다는 느낌으로 다가갔을 것이고, 그 불만을 전등을 핑계로 폭발시켰을 것이다. 알면서도 보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있으니 서류는 그대로 두고 각자 알아서 살자는 말이 나왔다. 나쁘지 않은 제안 같아서 혹은 자존심에, 그러자 한 게 마지막 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