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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Apr 30. 2018

아이를 보고 결심했다, '합리적인 헤어짐'을


언젠가부터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이 불편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한 후, 하루의 끝자락을 느슨히 보내는 시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인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 원목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쓴다. 이 시간은 네 살 아이에게도 꿀맛이다. 〈꼬마 버스 타요〉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삑삑삑-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의 세계는 깨진다. 남편은 현관에 들어서고 나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난다.

“왔어?”

“응.”


남편 겉옷을 받고 몸시중을 드는 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다. 남편은 옷 방으로 가고,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노트북을 바라본다. 그러나 온 신경은 남편에게 쏠려 있다.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는데 괜히 눈치를 본다. 아이 혼자 TV를 보는 것을 두고 남편은 ‘아이를 방치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남편과 나, 둘이서 무언가 할 때 가령, 밥을 먹으며 영화나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면 아이에게 스마트폰 주는 것에 대해선 ‘방치’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남편은 언제나 아이에게 “밥 먹었어?”라고 물어봤는데 그 질문은 마치 밥을 굶기는 엄마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또, 우리 부부가 외식을 하며 술 한잔할 때면, 아이의 밥상은 그 여느 때보다 부실했지만 평소의 남편 특유의 예민함은 부재했다. 이러한 기준 모호가 내겐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내로남불’로 다가왔다.    


남편은 육아, 살림, 일 모든 면에서 꼼꼼하고 완벽하다. 아이를 출산했을 때 연차와 휴가를 모조리 끌어다 썼다. 아내와 아들을 보살피기 위해서였다. 매끼 미역국을 끓여냈고 아이 예방접종도 함께 갔다. ‘자체 육아휴직’ 덕분에 남편은 그해 승진에서 미끄러졌다. 그럼에도 갓 태어난 아이와 함께 지낸 시간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정상 출근을 한 후에도, 퇴근 후부터 새벽 한두 시까지 남편이 육아 교대를 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토막잠을 청할 수 있었다.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해 남편과 교대를 하지 못한 바람에, 남편이 꼬박 밤새 아이를 돌보고 출근을 한 적도 두어 번 된다.


아이가 돌 즈음, 폐렴으로 갑작스레 병원에 입원을 한 적이 있다. 입원 준비를 하고 온 것이 아니라서 3박 4일 동안 병원에서 지낼 짐을 챙기러 집에 다녀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본인이 다녀올 테니 아이와 병원에 함께 있으라고 했다. 나와 아이의 3박 4일치의 짐을 남편 혼자 챙기는 것은 무리라 생각되었다. 그냥 내가 다녀오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지고 말았다. 다시 돌아온 남편의 두 손 가득한 짐을 하나하나 풀어헤쳐보았다. 그 후 나는 전적으로 남편을 믿게 되었는데, 내복, 외출복, 분유, 우유병, 기저귀, 거즈 수건, 로션 등 아이 물품은 물론이고, 이어폰, 읽다 만 책, 내가 쓰는 스킨케어 3종, 면봉 등 나의 물품까지 제대로 가지고 온 것이었다. 이어폰은 왜 가져왔느냐 물으니 “밤에 심심하면 영화 보라고”라는 대답을 듣곤 나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가정적인 면은 날이 갈수록 발하여, 칼퇴근을 하고 어린이집 부모 참여 수업을 함께하는 멋진 아빠가 되었다.    


여기까지 봤을 때 나는 복 받은 여자다. 남자가 가정을 돌보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여기가 딜레마의 구간이다. 살림이나 육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서 모두 여자에게 맡기는 남자와 살림과 육아에 빠삭하기에 모자란 부분이 눈에 다 보이는 남자. 이 둘을 섞으면 가장 좋겠지만 언제나 우리는 한 가지 모드를 택해야 한다.      

나 같은 경우, 남편이 이토록 가정적이기에 나의 역할은 언제나 남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듯했다. 남편은 “대체 아내로서, 엄마로서 당신이 하는 일이 뭐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본 ‘아내 혹은 엄마의 역할에 있어서 여성의 에너지는 한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라는 기사를 보여줘 봤자 돌아올 답은 뻔했다.

“당신은 둘 다 제대로 못하고 있잖아.”

남편의 ‘헛소리’에 대고 격한 반박을 했지만 한쪽 구석에는 정말로 나 자신에 대한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정말로 나는 직무 유기를 하고 있는가?


우리 집은 난장판이기보다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편이고, 설거지거리를 쌓아두는 게 싫어 식사 후 바로바로 설거지를 한다. 아이 저녁을 매일 차리고, 자기 전 책을 다섯 권 이상 읽어준다. 나와 아이 동영상을 본 어린이집 원장 모임에서는 “애착 형성이 굉장히 잘 되어 있다”라는 피드백을 듣고, 아이는 누구나 사랑하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밝은 아이로 잘 크고 있다. 이게 엄마 역할 아닌가? 도대체 남편이 바라는 ‘엄마 역할’의 표본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답의 실마리는 한 작은 사건으로 깨닫게 되었다.    


나와 아이의 점심 약속이 있던 어느 토요일. 우리 가족은 늦잠을 잤고 나는 부랴부랴 외출 준비를 했다. 약 한 시간 30분 후 어차피 점심을 먹을 거였지만, 가는 길 혹시나 아이 배가 고플까 봐 우유에 시리얼을 주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부부싸움 중 남편이 소리쳤다.

“아침부터 우유에 시리얼을 주는 게 엄마야?”


우유에 시리얼을 준 게 엄마 자격 운운 할 일인가? 더 억울한 것은 ‘시리얼에 우유’가 그날이 난생처음이었다는 사실이다. 남편의 그 한마디는 내게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남편의 견고한 ‘프레임’, 언제나 나는 점수 미달인 아내이자 엄마일 것이라고. 급기야 남편의 존재 자체가 내게 부담이자 눈치로 다가왔다.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불안해지는 것. 한 공간에 있는 것이 불편한 것.      


어느 날 남편이 내게 말했다.  

“같이 웃고 있어도 마음이 허해.”


나는 여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집안 분위기는 건조했다. 그러다가 한번 부딪히면 그날은 끝장이 났다. 처음에는 울거나 안기거나 짧은 언어로 말리던 아이 행동이 줄어들었다. 마치 자신의 개입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듯이. 마지막 부부싸움이 생각난다. 아이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우리 부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기지도, 울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이야기가 한참 길어졌고 아이가 너무 조용하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 부부는 아이 쪽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부모의 싸움에 적응한 듯한 아이의 모습은 상상 이상의 충격이었다. 우리 부부는 결정했다. ‘합리적인 헤어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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