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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Apr 23. 2018

남편이 출장 가는데 나는 감히 술을 마시러 갔다


“여보, 이번 주 일요일 출장 잡혔어.”

남편이 말한다. 달력을 확인하니 전날인 토요일, 대전 시민 스피치 대전 본선일이다. 친분이 있는 아나운서 K의 부탁으로 스토리텔링 코칭을 한 수업으로, 교육생들이 그간 갈고닦은 실력을 발휘하는 결전의 날이라 할 수 있다. “그날 스피치 본선일이라서 참관해야 하는데”라고 하니 “그래도 출장 가기 전에 저녁이라도 해야지” 한다.

내 일정이 먼저였잖아, 말하고픈 걸 누르고 “그럼 저녁 전에 올게”라는 대답으로 협의를 마친다.


토요일, 시외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본선 진출자 열 명에게 감사 카드를 썼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소장, 한복 디자이너, 아픈 아내를 둔 늙은 가장, 웃음 강사로 막 시작하는 장년, 은퇴하신 전직 교사 할아버지……. 그들을 만났던 짧은 시간이 생생하게 지나간다.

K 아나운서로부터 어느 날 전화가 왔다. 15분 스피치를 교육생에게 시범으로 보여줄 수 있냐고. 그렇게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교육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보, 나 돈 벌기는 글렀나 봐. 돈 한 푼 안 받았는데도 너무 재밌었던 거 있지!”


나보다 연배가 높은 인생 선배들은 딸내미뻘인 내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메모를 했더랬다. 질문도 많았다. 그들에게 나는 존경심을 느꼈고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가치를 얻고 돌아왔다. 짧은 순간에 내 마음을 많이 주게 되는 교육이 있다. 이번이 그랬다. 한 명 한 명에게 뜨거운 응원과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대전시청자미디어센터는 스피치 대전 외에도 다채로운 행사로 왁자지껄했다. 인파를 헤치고 대강당으로 들어가니 앞 쪽에 내 좌석이 있다. 한 명씩 프레젠터로 무대에 올랐고 핀 조명을 받는 그들은 그 순간 1인 배우였다. 나는 주책맞게도 참가자 가족들보다 더 울어댔다. 모든 시상이 끝나고 뒤풀이 장소로 이동할 시간, “저는 내일 남편 출장 때문에 이제 들어가봐야 해요”라고 하니 모두들 붙잡는다. 멀리서 오셨는데 저녁이라도 먹고 가시라, 출장을 남편이 가지 강사님이 가시냐.

몇 번을 망설이다 남편에게 상황을 알렸다. 의외로 남편은 하고 싶은 대로 하란다. 이 사람이 웬일인가 싶어 몇 번이고 진짜냐고 물었다. 확답을 받은 후에야 “남편이 놀다 오래요!”라고 외쳤고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약 두 시간 후 밤 아홉 시, 남편에게서 전화가 온다.

“당신 참 대~단해”

혀가 꼬여 있다. 부모님과 고기 구워 먹는다며 아이 사진도 간간히 보내더니 취했나 보다. 남편 목소리가 휴대폰 밖으로 흘러나온다. 순간 같은 공간에 있던 이들이 조용해진다. 급히 휴대폰 볼륨을 줄이며 짐짓 모른 체 “응, 그래, 고맙게 생각해” 하고 서둘러 끊으려 했지만 실패다. 덕분에 남편의 배배 꼬인 꽈배기 발언은 여과 없이 생중계되었다. 당황, 분노, 수치, 황당함을 참으며 끊을 타이밍만 기다리다 “나가서 당신 마음대로 살아”라는 남편의 말에 결국 나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싫으면 처음부터 싫다고 하지, 괜찮다고 해놓고선 왜 매번 이렇게 뒤통수 쳐?!”


그날 나는 밤 열두 시가 가까운 시간까지 술을 퍼마셨다. K 아나운서가 쥐여준 택시비로 집까지 오는 한 시간 동안 오만 생각이 다 든다. “그만해, 옆에 사람들 있어”라는 내 말을 무시하고 남편은 계속하여 주정 아닌 주정을 해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당혹스러웠다. 만약 같은 상황에 남녀가 바뀌었다면 애당초 가능한 일이었을까?

그날 우리 집 현관 비밀번호는 바뀌어 있었다. 다음 날 남편은 두 눈 시뻘겋게 뜨고 화를 주체하지 못하며 소리쳤다. “남편이 출장 가는데 감히 여자가 술을 마시러 가?”


언제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종합 편성 채널 방송국 촬영이 잡혔다. 하필 촬영 날이 부부 싸움을 거하게 하고 난 다음 날이었다. 출근하는 남편이 차 키를 가지고 나가기에 쫓아 나갔다. “오늘 나 촬영 날이야, 차 써야 돼.” 남편은 엘리베이터 문만 쳐다보고 서 있다. 급한 마음에 한 번 더 재촉한다. “나 오늘 일하러 가야 된다니까?” 남편은 고개만 돌린 채 내게 물었다. “그게 일이야?”


나의 일정이 남편의 일정보다 가벼이 여겨지는 상황은 일상 곳곳에서 마주친다. 이번 일만 놓고 봐도 그렇다. 나는 몇 주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정이었고, 남편의 출장은 불과 6일 전에 잡힌 일정이다. 뒤풀이도 일이냐 묻는다면 회식도 사회생활의 연장선이라는 남자들 언어를 끌고 오련다. 나의 일이 남편의 일보다 별것 아닌 일로 치부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간 “남편이 싫어하지 않아?” “남편이 괜찮대?”라는 언어를 얼마나 남발했던가. ‘감히’ 남편의 권위에 도전하고 남편의 출장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내 일을 우선시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엄청난 싸움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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