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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Jul 24. 2018

번외. 엄마가 엄마를 만났을 때

“뭐 이런 엄마가 다 있노 했지.”  


큰 엄마 말씀 들으며 나는 빙긋이 웃을 뿐. 낯설지 않았다. 내 이야기인가 했다. 나도 몰랐던 엄마의 34년 전 모습. 


1984년에서 85년 정도 됐을까, 큰 엄마는 친구들과 오래간만에 부산 기장으로 드라이브를 갔다. 동서고가도로, 광안대교, 송정터널을 거쳐도 1시간은 가야하는 거리니, 당시엔 1시간은 훌쩍 넘는 거리였을 것이다. 소문 듣고 찾아간 그곳은 클래식 카페였다. 멋스러운 주인아저씨가 클래식 LP판을 틀어주는 운치 있는 카페. 사업하는 남편과 두 아들 뒷바라지해야 하는 쳇바퀴 속 간만의 숨통, 큰 엄마는 한참을 음악을 듣다 돌아왔다. 그로부터 며칠 후, 시댁에서 가족 모임이 있었다. 큰 엄마는 시어머니(나의 친할머니)에게 얼마 전 다녀온 클래식 카페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우리 엄마, 불쑥 끼어들었다.

 “형님, 저도 가기 알아요.”   

큰 엄마는 깜짝 놀라 물었다.   

 “니가 그 먼데를 어째 아노?”   

 “얼마 전에 운전해서 갔다 왔죠.”  


 큰 엄마는 엄마의 말을 내게 전하며,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나는 고작 돌 정도 되는 아기였던 것이다. 아이를 시부모님에게 맡기고 1시간 넘는 거리를 달려 바닷가 근처, 클래식 카페에 혼자 찾아간 25살의 여인.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그 여인은 나의 엄마, 그리고 나였다.     


 엄마는 어린아이였던 나를 자주 시부모님에게 맡기고 외출을 했다. 양재를 배우고, 그림을 그리는 둥 문화센터에 드나들거나 음악회에 갔다. 내가 초등학생 무렵, 박스 안에서 웬 녹음테이프를 발견한 적이 있다. 라디오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니 엄마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래서, 나비가 아기 곰에게……” 그때 아빠가 방에 들어왔나 보다. “조용히 해요, 지금 동화 녹음하고 있는데.” 아기였던 내게 책을 읽어주며 녹음하던 엄마. 몇 번을 돌려 듣곤 했다. 별 생각은 없었다. 그냥 보일 때마다 틀어댔다. 다만 그때 엄마가 아빠에게 톡, 하고 쏜 말투를 듣고 엄마는 아빠를 안 좋아하나,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엄마를 차가운 사람으로 기억했다. 다른 모녀 지간처럼 친하거나 가깝거나 살갑지 않았다. 대부분 ‘친정엄마’라고 하면 눈물부터 나오는 가슴 시린 단어라고 하는데, 나는 그런 게 없었다. 친구들과 술자리에서도 엄마에 대해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라 공공연히 말해왔다. 나와 친구들이 엄마에 대해 정의 내린 한 문장은 이랬다. '자기 삶을 잘 사는 신여성.' 엄마의 간섭을 너무 많이 받는다고 느끼는 친구 몇몇은 우리 엄마를 부러워했다. 나는 엄마와 매일 통화하는 친구가 부러웠다. 그러면서도 엄마를 동경했나 보다. 대학 시절, 과보를 만들어야 하는 차례가 돌아왔다. 그 달의 주제를 ‘축제’라 잡고 기획을 했다. 인터뷰 기사도 몇 개 들어가야 했는데, 첫 인터뷰 주자를 엄마로 정했다. 인터뷰이를 본인 엄마로 정한 건 내가 처음이었다. 등산을 좋아해서 지리산부터 캐나다 록키 산맥까지 섭렵한 엄마. 당시 내겐 엄마가 엄홍길, 한비야처럼 보였다.   


엄마는 내게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친밀과는 멀었다. 힘든 일을 토로하고, 함께 쇼핑을 다니고 영화 보는 관계는 우리 사이에 없었다. 가깝고도 먼 존재.     


중학생 무렵이었나보다.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지 못하는 이유를 ‘드디어’ 찾은 나는 모임 중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존댓말 하니까 엄마랑 안 친한 거잖아요!”   

괜한 서러움에 나는 울음이 터졌다.   

“다른 친구들은 엄마랑 반말하는데.”  

시끄러운 전화기 너머 엄마는 쿨하게 답했다.  

“그럼 너도 이제 반말 해.”  

허탈함에 펑펑 울었다. 될 리가 있나. 그때 풀지 못한 숙제 덕에 여전히 엄마에게 존댓말을 쓴다.     


청소년 시절 엄마에 대한 동경은 성인이 되면서 애증으로 변해갔다.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 느꼈고, 결혼생활이 힘든 이유를 엄마에게서 찾으려 했다. 결혼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채, 엄마에게 악다구니를 쓰는 것으로 무의식에 숨어있던 엄마에 대한 분노를 증명해냈다.   


 유년 시절은 물론,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의 내가 기억나지 않은 때가 있다. 잘린 필름처럼 일정 기간의 기억이 사라진 것이다. 가족과의 여행이라던지, 일상이 살짝살짝 기억날 법한데 재생되는 영상이 없었다. 가끔 떠오르는 이미지는 있었는데 그 마저도 '살아있는' 기억은 아니었다. 앨범 속에서 본, 찰나의 순간이 찍힌 어린 날의 사진이었다. 나는 살짝 의심했다. 혹시 나를 학대한 건 아닐까? 그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게 아닐까?    

  

결핍이 망각을 초래하는 건가, 비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지내던 중, 갑자기 기억을 되찾(?)았다. 멍 때리던 어느 날, 진흙 속의 실처럼 무언가 보여서 쏙 잡아당겼더니, 감자처럼 줄줄이 올라온 기억의 타래. 하나가 나오니 연결된 기억은 줄줄이 달려 나왔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것에 대해 써보려 한다.     


초등학생 때 나는 도시락을 싸다녔다. 친구들 도시락과 내 도시락이 다른 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언제나 과일을 챙겨주셨다는 것, 그리고 엄마의 쪽지가 들어있었다는 것. 엄마는 내게 편지를 자주 썼다. 엄마의 필체는 지금도 또렷하다.     


 엄마는 책을 좋아했다. 덕분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도서관과 친해졌고, 내 방의 한 면은 온갖 전집이 꽂혀 있었다. 나는 언제나 책장 앞에서 놀았다. 엄마를 필두로 보수동 헌책방을 자주 갔다. 추리소설에 빠져있던 나는 코난 도일, 애거서 크리스티, 루팡 등의 추리소설 전집을 사 들고 오곤 했다. 해운대에 있던 추리문학관에도 갔다. 바다가 보였는지는 모르겠다. 도서관은 클래식하고 앤틱 분위기던 것 같다. 어쩌면 당시 나의 감정이 기억을 왜곡하는 건지도 모른다. 조용한 도서관에 엄마는 엄마대로, 나는 나대로, 동생들은 동생대로 앉아서 토스트를 먹으며 책을 봤는데, 만약 기억이 왜곡되었다면 코난 도일 때문일지 모른다.     


 엄마는 글을 썼다. 엄마 덕분에 나는 인터넷을 또래보다 일찍 접할 수 있었는데 그때가 초등학생 때였다. 전화기와 연결해서 쓰던 천리안. 전화가 오면 인터넷이 끊기는 이상한 원리. 가끔 엄마가  동시와 글을 염탐했다. 덕분에 나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엄마는 직접 옷을 만들어 입혔다. 시부모님께 나를 맡기고 배운 양재 기술을 실제 써먹은 셈이다. 원피스부터 쓰리 피쓰까지. 블라우스, 치마, 바지 3종 세트는 아직도 생생하다. 하얀색 블라우스에 멜빵처럼 어깨 끈이 달린 셔링 넣은 남색 치마, 치마와 함께 입는 항아리 모양 하얀색 바지였는데(상상이 안 가겠지만 예뻤다), 세 벌 모두 땡땡이었다! 스케치북에 연필로 그러져 있던 각종 도안이 생각난다. 외할머니에게 들은 바, 엄마의 원래 꿈은 의상 디자이너였단다.    


그림도 잘 그렸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기법이었는데, 내 사진에 1cm 간격의 격자로 가로, 세로줄을 그어놓고 그걸 보고 대형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진짜 컸다. 사촌 오빠 얼굴까지 그려 선물로 주었으니 실력이 꽤 있는 셈이다. 어린이 집 교사처럼 부직포, 도화지 등으로 교구를 만들어 주면 우리 삼 남매는 그걸 가지고 놀았다.     


 요리도 잘했다. 나는 인스턴트 과자, 라면, 분식집 떡볶이 등을 오랫동안 먹지 않았다. 지금도 즐겨 먹진 않는다. 우리 삼남매가 가장 좋아하는 엄마 요리는 후라이팬으로 만드는 피자. 지금도 엄마표 피자를 사랑한다. 남편은 엄마의 밥상을 볼 때마다 한정식 집 하시라고 호들갑이다. 남편 덕에 엄마의 음식 솜씨를 새삼 알았다.    


나는 엄마의 외모, 재능, 기질, 성격 등을 빼닮았다. 모든 것은 엄마가 준 선물이었다. 왜 나는 그동안 친구들 엄마, 드라마 속 엄마, 영화 속 엄마와 ‘우리 엄마’를 비교했던 것일까. 나 역시 세상이 말하는 엄마, 엄마의 이상적인 모습의 신기루를 좇고 있었던 셈이다. 엄마는 엄마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주었다. 이걸 깨달은 순간, 비로소 애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요즘 나를 보면 엄마가 느껴진다. 9개월 아들을 시어머님께 맡기고 강의 들으러 다니던 나, 글을 쓰는 나, 아들을 데리고 연극, 뮤지컬, 영화를 보러 다니는 나, 편지를 쓰는 나. 26살의 엄마가 35살의 나와 만났다.   

  

예술적이고 감성적인 경험만큼 중요한 것이 정서적 채움이라는 것을 안다. 이건 엄마로부터의 결핍으로 배운 것이다. 나는 아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어주고, 하던 일을 멈추고 아들 얘기를 듣는다. 스킨십을 자주 하고, 자주 안으며, 사랑한다는 표현을 많이 한다. 26살의 엄마가 몰라서 하지 못했던 행동을 35살의 내가 한다.  

  

지난 주말 들린 큰집. 큰 아빠 내외와 이런 저런 이야기 하던 중 큰 엄마가 물었다.

"시현이 네 엄마가 막 살갑거나 그러진 않제."

나는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왜인지 모를 씁쓸한 수치는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나는 그녀를 좋아하면서도 미워하는 요상한 감정을 품지 않는다. 남편이 줄곧 요구하는 '엄마 상'은 시어머님 모습이란 걸 깨닫고 '엄마 콤플렉스'에서 벗어났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 방식으로, 우리 엄마는  엄마 방식으로 독특한 사랑을 각자 주었다. 나는 또 나의 방식으로 아들을 사랑할 것이다. 나는 부족한 엄마가 아니었다. 나의 존재 자체로 아이에겐 이미 좋은 엄마였다. '좋은 엄마'란 행위가 아닌 존재인 셈이다.

취미를 공유할 사람 하나 없는 부산에서 홀로 차를 몰고 기장으로 달려가던 여인, 의상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선을 본 덕에 가정주부로, 삼 남매의 엄마로 살아야 했던 여인, 나보다 어렸던 31살의 나이, 남편 도움 없이 딸 둘과 아들 하나를 키운 여인. 34년이 지나서야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는 또 다른 여인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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