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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Apr 01. 2019

나의 시계, 너의 시계, 우리의 시계

1984년생 엄마가 2014년생 아들에게

매주 화요일, 학교 갔다 집에 오면 밤 11시 30분경. 집안의 불이라곤 LED조명만 켜져 있고 거실에는 안개처럼 어둠이 깔려 있다. 매일 밥을 해 먹고 빨래를 널고 TV를 보는 우리의 공간이 이때만큼은 낯섦의 고요함으로 다가온단다. 적막의 침입자처럼 엄마의 옷깃 스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야.


엄마는 옷방으로 바로 가는 대신 부엌으로 가본단다. 싱크대는 물기 하나 없이 잘 정리되어 있고 너의 어린이집 도시락도 잘 닦여있는 걸 보면 그때서야 엄마의 하루가 끝났다는 걸 실감해. 동시에 엄마는 이상한 감정을 느껴. 그 풍경에 아빠의 손길이 홀로그램처럼 덧입혀지거든.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하는 아빠가 여전히 다들 일하고 있는 오후 6시, 퇴근시간보다 1시간 늦게 회사를 나서는데도 왠지 모를 미안함과 눈치를 감수하며 너에게 갔을테지. 하원한 너와 함께 장을 보고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너를 씻기고 잠자리에 들기까지의 아빠의 수고를 훑으며 엄마도 비로소 겉옷을 벗는단다. 엄마 몸뚱이 하나만 씻으면 된다는 고마움을 느끼며.     


집 정리가 가끔 되어있지 않은 날 늦은 시간 퇴근한 아빠가 왜 짜증을 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 혼돈의 바깥세상에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안전의 안쪽 세상마저 혼돈의 광경이 펼쳐져 있으면 그야말로 혼돈이 오는 거야. 한때 엄마는 그런 아빠가 이해가 안 갔어. 눈에 보이는 게 무엇이든 무시하고 옷 갈아입고 씻고 나와서 자면 끝인 걸 왜 저렇게 예민할까 싶었거든. 알고 보면 행사든, 공부든, 업무든 “이제 끝났다!”의 표식이 바로 정리잖니. 하루의 마지막을 맞는 집이라는 공간 역시 정리가 되어야 오늘이 끝났다는 걸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무의식의 신호가 있나 봐. 행여 어질러진 거실을 모른 체 침대에 눕더라도 마지막 처리를 하지 않은 듯한 찜찜함을 아빠는 느꼈을 거야. 물론 다음날의 숙제를 해치우는 몫은 아빠가 아니라 엄마지만 그런 거지, 뭐.


엄마는 공부를 시작한 것에 무척 만족해. 사실 엄마 인생에 대학원이라는 것이 있을 줄 상상도 못 했어. 대학교까지만 해도 공부는 ‘해야 하는’ 것이지 ‘하고 싶은’ 종류의 것은 아니었거든. 35살이 되어서야 하고 싶은 공부가 생겼고 다시 학생이 된 걸 보면 엄마의 시계는 남들보다 조금 늦나 봐. 입학식 날, 행사 시간인 오후 5시보다 20분쯤 일찍 도착해서 강당 두 번째 줄 중앙에 자리를 잡았어. 15년 만에 받아본 학생증을 자꾸만 들여다보고 만져보았지. 세상의 시계에 따라서 대학에 간 스무 살 때의 학교 강당, 학생증, 다이어리, 학사 편람 등과 그 생명이 달랐단다. 엄마의 시계에 맞춘 가치와 기쁨이었어.     


그러고 보니 엄마의 여동생도 올해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구나. 은행에 다니다가 퇴사하고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걷고 온 네 이모 말이야. 그 뒤에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행을 몇 번 다녀오더니 그러더라. 언제든 퇴사하고 입사할 수 있는 직업을 구해야겠다고. 공무원을 준비할까 했지만 퇴사와 입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탈락하고 최종적으로 선택한 직업은 간호사였어. 이 말은 즉슨 32살에 다시 간호대학교 신입생이 되어서 4년 간 공부를 해야 하고 엄마 나이가 되어야 신입 간호사가 되어 돈을 벌 수 있다는 뜻이야. 만약 네가 이 글을 읽을 수 있을 때쯤 네 이모가 간호사라면, 이 과정을 성공으로 해냈다는 걸 알렴.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적당한 시기에 대해 묻는다면 엄마는 이모 이야기를 해주고 싶구나.


엄마 대학원 동기 중에 왕언니 학생이 계셔. 수업이 끝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분은 주중에는 공인중개 일을 하시고 주말에는 손자를 돌보신대. 대학원은 자식에게 비밀로 했다가 최근에야 얘기를 했는데 "엄마 나이에 무슨 공부야? 손자나 잘 봐주지" 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시더구나. 엄마는 순간 딸인 동시에 엄마로서의 양가 감정을 한꺼번에 느꼈단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고, 자식이 있으니 말이야.  


오늘 엄마는 이어령 박사의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라는 책을 일부 만나게 되었는데, 이 책의 주인공인 ‘딸’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50대의 여인이야. 살아있는 지성, 시대의 어른이라고 불리는 이어령 박사는 이 책 안에서만큼은 회한과 후회에 사무쳐 계시더구나. 유년시절의 딸은 매일 서재 문 앞에서 아빠를 불렀대. “아빠, 굿나잇~” 하지만 집필에 몰두한 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건성으로 답한 날이 여러 번. 결국 “굿나잇”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박제되어 버렸지.     


 만일 지금 나에게 그 30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래, 민아야, 딱 한 번이라도 좋다.
나는 그때처럼 글을 쓸 것이고 너는 엄마가 사준 레이스 달린 하얀 잠옷을 입거라.
그리고 아주 힘차게 서재 문을 열고
“아빠 굿나잇!”하고 외치는 거다.
약속한다.
이번에는 머뭇거리며 서있지 않아도 된다.
 나는 글 쓰던 펜을 내려놓고,
읽다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활짝 편다.    


엄마가 이 글을 쓰는 동안 너는 엄마를 불렀단다. ‘헬로카봇’ 퍼즐을 함께 맞추자고 말이야. 평소 같으면 "엄마 이것만 하고" 노트북 앞에 그대로 앉아있었겠지만, 엄마는 벌떡 일어나 네 옆으로 갔단다. 어느 어른의 먼저 돌아간 시계가 아니었다면 자칫, 무엇이 더 중요한지 엄마는 놓칠 뻔했지.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반려 직업을 선택해 20살들과 공부하는 네 이모도, 자식의 타박을 뒤로한 채 대학원 원서를 낸 동기 할머니도, 한글을 배우러 문해 교실에 가는 일흔의 노인도, 모두의 시계는 각자의 삶에 맞추어 째깍 고개를 넘어가는구나. 세상의 시계와 나의 시계 속도가 다르다는 것만 알아도 편안해진단다. 엄마의 지도 교수님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엄마와 비슷한 또래라고 하시더구나. 현재 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래. 내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되었나, 새삼 시계 바늘을 반추해보지. 대학 졸업 후 바로 바로 석, 박사를 진행했다면 교수가 되기엔 충분한 지난 10년이니 말이야. 그때는 “으, 어떻게 10년이나 더 공부해?” 치를 떨었는데 10년이라는 시간, 지나고 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닌듯해. 마치 구간 점프를 한 느낌이랄까. 기억하자. 시간의 길이와 무게를 섣불리 재단하거나 넘겨짚어 지레 포기하지 않기. 나의 시계 속도에 맞추기.


10년 후 이모는 6년 차 간호사가 되어있을 테고,16살이 된 너는 헬로카봇 퍼즐쯤은 기억도 못할 테지. 마흔 여섯의 엄마는 조금 더 괜찮은 글을 쓰고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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