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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살다 Oct 22. 2021

할머니의 커리큘럼

내가 문구 덕후가 된 것은 할머니 때문인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할머니의 2층 집 교자상 앞에 앉아 절대적인 시간을 보냈으니 

내가 맘편하게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은 연필, 샤프, 지우개, 책받침 뿐이었다.

사각거리며 써지는 연필, 부드럽기는 한데 가늘게 써지지는 않는 연필, 너무 진해서 잘 지워지지 않는 연필.

싹싹 잘 지워지는 지우개, 똥만 길게 나오고 오히려 더 지저분해지는 지우개. 

샤프 구멍과 샤프심 굵기가 맞지 않아 자꾸 헛도는 샤프, 조금 세게 쓸라 치면 톡톡 부러져 버리는 샤프.

이 다양하고 풍성한 필기구의 세계에 나는 일찍이 빠져버렸던 것 같다. 

그래서 학교 앞 하나 문구에 들러 종이인형 보다 더 먼저 구경하는 것은 새로운 샤프와 지우개 코너였다. 

볼펜과 수성펜 영역은 감히 구매할 수 없었는데, 이유는 기억이 잘 안난다. 


상당히 많은 시간동안 나는 쓰고, 쓰고, 또 썼다. 

모양을 따라 쓰고, 베껴 쓰고, 때로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닥치는 대로 썼다. 

어쨌든 백지를 메꾸고 공책 한 페이지 두 페이지가 넘어가면 할머니의 칭찬은 따논 당상이었다. 

하교 후 할머니 2층 집에는 공부방이 열렸는데, 동네 아이들이 많게는 6~7명, 적을 때는 3명 정도가 와서 

지금 말로라면 '방과후 수업'을 했다. 

학년도 다양하고 심지어 미취학 아이들도 있어서, 정규 교육과정의 학년별 커리큘럼으로 수업을 하는 것은 아니고, (해서도 안되고) 그야 말로 그 곳은 뭐든지 하는 곳이었는데, 

현직 교사인 할머니가 감독하신다고 하니 맡기는 엄마들도 안심했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녁까지 일해야 하는 엄마들의 몇 안되는 옵션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할머니의 커리큘럼은 참 다양하고, 유니크했다. 


- 경필공부: 바르게 한글 쓰기 연습 (난이도 ★)

- 한문공부: 바르게 한문 쓰기 연습 (천자문 및 자신의 이름 쓰기:난이도 ★★★)

- 지리공부: 아웃라인만 그려진 대한민국 전도에 산맥과 평야와 도청소재지를 그려넣기 (난이도 ★★★★★)

- 그림보고 글로 쓰기: 공책 반 페이지에 붙여진 그림을 보고 묘사하는 글 쓰기 (난이도 ★★)

- 역사책 읽기: 이야기 한국사 읽고 독후감 쓰기 (전권 23권;;; 난이도 ★★★★)

- 산수공부: 주로 사칙연산 위주의 핸드메이드 문제집 (난이도 ★★)


물론 학교 숙제가 있다면 그것이 먼저였고, 방학이라면 교육방송과 탐구생활이 먼저였고, 이 모든 과목을 다 마쳤다면 일기 쓰기가 남아있었다. 나는 우수한 학생이었다기 보다 절대적인 체류시간이 많은 학생이기에 거의 매일 모든 과목 완료 및 일기 쓰기까지 마쳐야 했다.


나중에 할머니는 내가 첫 아이까지 낳고 뵈러 갔을 때, 어렸을 때 당신이 한문을 가르쳤기 때문에 내가 중문과를 갔고 그래서 대기업에 훌륭히 취직한 것이라고 하셨다. 맞다고, 할머니 덕분이라고 감사하다고 했다. 


자의던 타의던, 그 경험이 좋았던 끔찍했던, 어떤 경험이던지 남는 것은 있다. 

나의 경우는 '쓰는 것에 대한 익숙함'이 남은 것 같다.   

비단 필기구에 대한 집착이나 과소비(?) 뿐 아니라, 내 생각을 글로 써내는 일이(비록 진짜 내 생각이 아니었다해도) 나에겐 편안하고 즐겁고 언젠가는 작가로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확장된 것 같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글짓기 대회에서 여러차례 수상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나의 글솜씨 때문이라기 보다는 일찍부터 읽는 사람의 취향을 반영한 글쓰기를 해온 노하우였다. 

즉, 나의 글은 모두 할머니가 읽으실 거니까, 할머니가 좋아하는 키워드 예를 들면 순국선열의 은혜에 보답, 애국자가 된다,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의사가 되어 훌륭한 인재가 될 것. 등을 넣어 결의에 찬 마무리를 하면 늘 할머니의 극찬이 이어지곤 했다. 유년의 글짓기 대회라는 것도 자유 심상을 써내려가는 일보다는 늘 주제가 있었으니까. 나에겐 참 쉬운 일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엄마가 문방구를 차리라고 힐난했을 정도로 나는 엄청난 문구류를 사들였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싸인펜과 볼펜과 유성펜과 수성펜과 예쁜 노트들이 많았다. 

알록달록 빛나는 문구류들이 어두운 입시 터널 속에서 누릴 수 있던 단 하나의 낙이자 기쁨이었다. 


취직하여 경제력이 생기고 출장을 다니고 하면서는 만년필과 몰스킨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노트만도 몇권인지 모른다. 

이제는 글짓기도 디지털로 전환되어 지금 이렇게 타자를 두드리고 있지만 

할머니 공부방에서 교자상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지도를 그리고 한문을 쓰고 그림보고 글로 쓰기를 하던 가느다란 내 손가락과 흑연의 기억이 

조금은 그리워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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