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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살다 Oct 23. 2021

'그래도 엄마니까'라는 착각

엄마를 안 본 지 1년이 넘었다.

둘째 은우가 작년 7월에 뇌종양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시작한 시점부터였다. 

우리집에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한 것이.

아이가 항암제로 인해 면역이 약해져있으니 감염관리를 위한 부득이한 조치라고 

시댁과 친정 가족들에게 설명했지만, 사실 타겟은 엄마였다. 


내가 결혼해서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엄마는 나의 롤모델이자 우상이었다. 

나도 엄마처럼 평생 내 일을 놓지 않고 커리어를 쌓아 나아가야지.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내 힘을 가져야지.

우리 엄마 같은 세련되고 깨어있는 여성은 없어.

이런 굳건한 생각은 어린 시절 엄마의 오랜 부재를 정당화, 합리화 했다. 

아침에 일어나도 없고 저녁에 집에 와도 없고, 방학 때도 연수든 교육이든 단식원이든 없고, 

하여튼 엄마는 집에 없었다. 

그대신 우리를 차에 태워 엄마의 모임이나 여행, 연수 등에 데리고 다녔다. 

우리의 옆에 있어주었다기 보다는 엄마 옆에 우리를 달고 다녔다. 


내가 지켜본 엄마의 인생은 끝없는 타이틀 쟁취였다. 

고등학교 교사였을 때 야간 대학원을 다니며 석사학위, 박사학위 타이틀을 취득했다.

엄마는 그게 엄마가 여자라는 것과 학벌이 딸려서 스카이 동료 남자 교사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보완되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아빠와 우리에게 설명했다. 

교감과 교장, 장학사 등의 타이틀에 도전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좌절되었고

그 후에는 다양한 대학의 야간 대학원에 시간강의 제안을 받아 출강하였다. 

틈틈이 조리사 자격증, 사회복지사 자격증 을 취득했고, 천재교육 문제집도 공동집필해서 인세도 받았다. 

엄마의 3~40대, 즉 나의 초등~중학생 시절 엄마는 참 바빴고, 집안의 모든 일은 엄마의 스케쥴에 맞춰야했다.

그것이 당연했다. 


엄마가 집에 있을 때는 가뭄에 콩나듯 드물었는데, 에너지가 방전되어서 쉬어야 할 때 뿐이었다. 

우리와 대화하고 산책을 나가고, 뭔가 액티비티를 하는 것은 꿈도 못꿀 일이었다. 

우리는 전쟁에서 돌아온 투사를 맞이하는 마음으로 엄마를 반기며 화장을 지우고 수고를 치하하고 

그 후에 남은 시간에 고르고 골라 나의 좋은 소식, 즉 시험을 잘 봤다든지, 반장이 되었다든지 등을 전했다. 

그 외의 신변잡기를 공유하는 건 왠지 미안했다. 


그렇게 명실상부 우리집의 주인공이었던 엄마는 정년퇴직을 한 후 주인공이 될 기회가 줄어들자 

가족 행사에서 주인공이 되기를 자처했는데, 크고 작은 가족 모임부터 나와 동생이 결혼하고 출산하는 시점에서까지 그 영향력을 과시했다. 영향력이란, 엄마가 표정을 구기고 아무 말도 안 한 채 분위기를 잡으면 자연히 관심이 엄마에게 쏠리고 그래서 다들 긴장하고, 결국 엄마의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게 하는 고약한 심술의 기술이었다. 

나와 동생이 결혼할 때 엄마는 엄마 위주로 동영상을 촬영해줄 사람을 구했고, 내가 둘째 은우를 낳았을 때 보호자로 있던 하루는 은우의 동영상만 줄창 찍어 하루 종일 모든 카톡 친구들에게 전송하고 축하를 받았다. 유의사항을 설명하고 신생아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는 간호사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그래도 엄마니까' 라는 일반적인 믿음으로, 아이 둘을 키울 때 도움의 손길을 시도한 적도 많지만

그 믿음은 번번이 나를 배신했다. 


가장 큰 배신감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워킹맘이 되었을 때 찾아왔다. 

엄마의 부재와, 엄마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서러움을 '엄마는 일하는 엄마니까' 라는 

대명제로 순화시키고, 멋진 엄마를 두려면 어쩔수 없는 부분 이라고 위로해왔지만 

사실 워킹맘이라고 그렇게 집에 없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나 스스로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노력하는 만큼, 시간을 잘 나눠쓰고 체력을 키우고 하면 저녁시간 아이들을 안고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이야기 하는 순간 정도는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정말 엄마에게 중요한 건 엄마뿐이었구나' 싶었다. 


동생과, 이제 회사에서 쥬니어도 아닌데 시니어가 되기에는 부족한 나 자신이 고민스럽고, 아이들 키우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또 시댁에서의 역할도 있고 참 할일이 많다...라는 말이 나오자, 엄마는 뜬금없게도


"그래서 내가 그 때 박사공부를 시작했잖아."


라는 말을 했다. 엄마는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면 늘 외면하고 도피하고, 남에게 미루곤 했다. 

아, 박사공부도 그런 거였구나. 육아도 교사생활도 아빠와의 관계도 다 꽉막힌거 같고 즐거운게 없으니 그래서 공부한다고 나가버렸구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것 같은 자리에서는 손절하고 떠나는 것이 엄마였다. 

엄마를 목빠지게 기다렸던 많은 날들이 스쳐지나갔다. 

엄마 다리를 안고 자던 내 모습이 슬프게 느껴졌다. 


그래, 엄마가 어떻게 인생을 살든 사실 그건 엄마의 몫이다. 

내게는 엄마를 평가할 권리도, 원망할 필요도 없다. 어쨌든 엄마도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1년 넘게 엄마를 안 본 건

'그래도 엄마니까' 라는 믿음에 또 한 번 크게 배신을 당해서였다. 


그것은 크게 두 번의 사건이었다. 

은우가 병원에서 뇌수술을 마친 후 회복하는 중 우리집에 와있던 엄마.

나는 계속 병원에 있다가 남편과 바통터치를 하고 옷가지와 먹을 것들을 챙기고 첫째도 안아주러 집에 왔는데, 냉장고 앞에 쭈그리고 앉아 먹을 것이 뭐가 있나 살펴보다가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꾹꾹 눌러왔던 감정이 그 순간 폭발해버린 것이었다. 무방비 상태로 거기에 앉아 흐느끼고 있는데, 엄마가 무슨 말을 하며 부엌으로 들어왔다가 나를 보았다. 우는 나를 보고. 가만히 있다가. 그냥 가버렸다. 


그냥 가버렸다. 


길가던 사람도 내 사연을 들으면 손이라도 한 번 잡아줄 법 한데.

우리 엄마는 우는 나를 보고 그냥 가버렸다. 방에 들어가 앉아 이 상황을 또 동생에게 중계방송했다고 한다.

크게 충격을 받고 낙담을 한 나는 그 후로 우리집에 어떤 가족도 오지 말아 달라는 공고를 내붙였다. 

남편의 동의도 얻어 시댁 분들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지금 아이의 치료만으로도 멘탈을 부여잡기가 힘들었다. 그 외의 스트레스를 견딜 여지가 없었다. 


4개월쯤 지났을까.

엄마는 새벽 3시반 경 우리 부부에게 또 한 번 충격을 주었다. 

우리집에 못오게 한 것이 엄마에게는 적잖이 괘씸한 일이었나보다.

손자의 항암치료라는 이 비극적이고 중대한 이벤트에 역할도 없이 출연하지 못하게 한 것이 

선천적 주인공 재질인 엄마에게는 못견디는 형벌이었다. 

더군다나 그 날은 엄마의 생일이었다. 

1년에 한 번 가장 크고 화려하게 주인공으로 거듭날 수 있는 날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 또한

엄마에게는 삼재에 버금가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문의 문자 두 통을,

힐난과 질책과 꾸짖음을 가득 담은 문자 두 통을, 아이의 투병과정을 견디고 있는 딸과 사위에게 보내왔다.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우리는 '불효자식'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말이다. 



'그래도 엄마니까' 라는 말은 살면서 나에게 수없이 많은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사실 그 말 만으로 틀린 것은 없다. 

그 다음에 어떤 말이 붙느냐에 따라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 그래도 엄마니까 나를 안아줄거야

- 그래도 엄마니까 나를 도와줄거야

- 그래도 엄마니까 일이 바빠도 내가 더 중요할거야

- 그래도 엄마니까 나를 먼저 생각해주겠지

라는 생각은 나의 착각이었다.


- 그래도 엄마니까 니가 이해해라

- 그래도 엄마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잘 해

라는 사람들의 말은 아직은 내 마음에서 반사되어 튕겨나온다.




'엄마'라는 한 단어에 너무 많은 기대와 무게가 실리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인 것도 같다. 

'엄마'도 그냥 고군분투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한 인간이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읽었다. 부모는 존재해주는 것이 역할이다. 라고.

뭔가를 해주려 하지 말고 아이들 옆에 존재하라. 

그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고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생각을 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이 

부모의 궁극적인 역할이라고.


엄마가 그냥 내 옆에 있어주었다면 좋았을 걸.

내 마음속의 구멍에 35년 동안 바람이 휘잉휘잉 부는 일은 없었을 텐데.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생까지 엄마는 나에게 참 많은 것을 해주었지만 


사실은 

엄마가 내 옆에 있어주었으면 했어.

그게 전부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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