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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살다 Oct 27. 2021

달콤한 룰라바이

인간이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가하면, 

오랜 시간에 걸쳐 깊은 고통 속에서 겨우 깨달은 진리도 시간이 지나면 하얗게 까먹는다. 

그야말로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살면서 일어나는 천태만상에 일일이 반응하며 감정에 휩쓸리며 산다. 

희로애락을 공평하게 분배하여 느낀다면 좋을텐데, 어리석은 인간은 부정적인 감정에 집중하며 이를 극대화시킨다. 일상 다반사,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내 의지와 상관도 없고 내 인생과 연관도 없는 잡다한 일들에 실망하고 절망하고 분노하는데 열중한다. 

그리고는 지친 얼굴로 말한다. 

"사는게 참 쉽지가 않다" 며 술을 한잔 쭉 들이키고 담배를 한 대 후, 핀다. 

가끔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기 위한 구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는 쇼핑을 하고 폭식을 하기 위한.

모두가 꼭 껴안고들 있는 그 숱한 하찮은 드라마들 말이다. 



어제는 은우가 치료를 마친지 6개월되어 MRI 를 찍고 진료를 보고 왔다. 


"이제 보통 아이처럼 지내세요. 이거 해도 되나? 라고 생각이 드는 건 다 해도 좋습니다. 

아이가 열이나고 아프면 이젠 응급실에 오지 말고 동네 소아과로 가세요."


은우의 면역력이 많이 회복되어 어린이집도 갈 수 있고 해외여행도 갈 수 있다고 하셨다. 

그렇지 않을까봐 걱정한 것도 아니었고,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교수님의 목소리로 들으니 그 말들이 바위에 새겨지는 것처럼 명확하게 다가왔고 실감이 났다. 

또 시간이 갔고, 무사히 아이는 컸고, 고맙게도 면역력이 90% 까지 회복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눈물이 났다. 


아이들을 재울 때 나는 매일밤 유투브에 룰라바이를 검색한다. 

자장가로 검색하는 것보다 더 조용한 오르골 느낌의 음원들이 나오는데, 은우가 병원에 있을 때 선곡했던 곡이다. 이름은 모른다. 그냥 lullaby 8 hours  로 검색했을 때 초승달 모양이 그려진 영상인데, 3시간 동안 같은 멜로디가 계속 플레이 된다. 


오늘도 이 멜로디를 들으며 아이들을 재웠고, 

오늘도 병원 생각이 났다. 


은우가 거의 3주를 1인실에서 격리되어 지냈을 때가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병실에서 나갈 수가 없어 그야말로 인고의 시간이었다. 나도, 은우도.

이 자장가로 은우가 낮잠을 자면 나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처럼 쾌재를 외치며 지하 1층 편의점으로 갔다.  입원 초반에는 아이가 금방 깰까 싶어서 지하까지 내려가는 것은 꿈도 못꾸었지만, 룰라바이를 들으면서 2시간 3시간을 자는 것을 목도하고 나서는 10분~15분 정도 자리를 비우는 것은 괜찮겠구나 싶었다.


지하 1층 편의점은 너무나 설레고 즐거운 곳이었다. 

삼각김밥과 커피우유와 각양각색의 컵라면들까지. 병원밥 메뉴가 맘에 안들 경우의 back up plan 을 든든히  챙길 수 있었다. 

거기다 아티제에서 아메리카노와 크루아상 샌드위치까지 사면!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었다. 

맨발에 병원용 슬리퍼를 신고 츄리닝을 입고 아티제에 줄을 서 있던 그 순간 나는 얼마나 행복하던지! 

은우에게 특식으로 제공할 마들렌까지 계산하고 양손 묵직히 엘리베이터를 탄다. 

8층에서 내려 혹시나 은우 우는 소리가 들리나 신경을 집중하고 문 앞까지 걸어와 살짝 들여다보면

아까 자세 그대로 자고 있는 은우가 보인다. 

조용히 문을 열고 보호자 침대에 앉아 확보해온 멋진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아티제 빵봉투와 편의점 비닐봉투는 왜 그렇게 바스락 거리는 건지!

룰라바이 멜로디는 계속 흐르고 있다. 

그 멜로디를 들으며 나는 조심조심 크루아상 샌드위치 포장을 벗기고 천금같은 한 입을 베어 문다. 

역시나 천상의 맛이다. 

과하게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뚜껑을 열어 조금 식히는데, 병실 가득 향긋한 커피 냄새가 가득찬다. 

샌드위치를 세 입 정도 먹고 난 후 한 모금을 후릅 마시면 

역시나 천상의 맛이다. 


우리 착한 은우는 미동도 없이 쿨쿨 잔다. 모든 것이 룰라바이의 덕이다. 

그 사랑스럽고 다정하며 단순한 멜로디.


일상으로 돌아와 역시나 나도 한 사람의 한심한 인간으로서, 수많은 '그냥 일어나는 일들'에 반응하는데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다. 걱정하고 분노하고 불평하고 고민하고 전전긍긍한다. 

은우가 힘든 치료를 받을 때는, 일상이 얼마나 기적인지, 특권인지, 여기서 퇴원하기만 하면 감사하며 살겠노라 다짐했건만.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매일 밤 룰라바이를 들으며 병원 생각을 할 때

그 1인실 병실에서 조용히 나와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사러 갈 때 나의 마음에 

도대체 어떠한 불평불만이 있을 수 있었을까.

오로지 환희와 기쁨만이 가득했던 그 가벼운 발걸음. 그 설레임과 달콤함을 기억한다. 


그러고 나면 지금 내 마음에 자리한 불만과 걱정들을 가분히 모종삽으로 떠내어 저 멀리로 휙, 던져버린다. 

한 팔에 하나씩 아이들을 안는다.

이제는 품에 안기가 조금 버거울 정도로 커가는 내 보물들.

내 마음은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찬다. 

멜로디를 따라 아이들은 꿈나라로 떠난다. 

나는 살며시 눈을 내려 그 천사같은 얼굴들을 바라보면서

과연 내 아이라서 이렇게 이쁜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으로 이쁜 것인지 꼭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한다. 



사는건 쉽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나머지 시끄러운 것들은 모종삽으로 난짝 떠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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