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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살다 Nov 20. 2021

밤, 루브르

나의 벨 에포크, 파리에서의 1년

퇴근길 히볼리 가를 지날 때 였다. 


'동계 Atelier du Carrousel 개강' (물론 불어로 쓰여있었다)

알록달록한 포스터가 따뜻한 노랑색 가로등 빛을 받으며 루브르 궁 담벼락에 붙어있었다. 

프랑스는 광고용 포스터나 디스플레이 규제가 엄격해서, 여기저기 도배되있는 건 국가적인 행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그 포스터를 다시 보기 위해서는 길을 한바퀴 돌아 와야 했다. 

다시 그 자리에 왔을때 최소한 속도를 줄이고 지나가며 정확히 스펠링을 보고 기억한 후, 집에 도착해서 노트북으로 검색을 해보았다. 아, 그 당시만해도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는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회사에서 오래 성실하게 일했다는 보상으로 (라고 얘기하면 MSG 가 많이 추가된 버전이고) 혹은 어쩌다 자리가 나서? 운이 좋아서? 등등 복합적인 사유로 나를 파리에 1년 파견해주었다. 

도착한 후 처음 3개월은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좋았고 아침에 눈만 떠도 좋았다. 

출퇴근길도 행복했고 영화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출근후~ 퇴근전까지는 한국에 있는것 같았지만!)

왠만한 명소는 다 가보고 좋다는 것 맛있다는 것도 주말마다 다 해보았을 무렵,

아, 뭔가를 더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세계 예술과 명품과 문화와 음식의 중심 파리에 있는데 정말 이게 최선인가? 이건 내가 관광객으로 와도 다 할 수 있는 것들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아뜰리에 카루젤의 포스터를 운명처럼 발견한 것이었다. 

https://madparis.fr/Decouvrez-le-programme-des-stages-de-Noel

< 지금 혹시나 해서 들어가본 Atelier Carrousel 사이트, 겨울방학 프로그램 등록 진행 중이었다.>


Atelier 라니!

나의 유일한 취미인 그림 그리기를 혹시 할 수 있으려나?

불어로 빼곡하게 차있는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니, 루브르 장식예술 미술관에서 주관하는 문화 프로그램이었다.

즉, 백화점 문화센터 처럼, 루브르 문화 센터였다!

프로그램도 매우 다양해서, 회화, 조소, 만들기 가 연령별로 마련되어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대부분 평일에만 수강이 가능했다. 프랑스는 주말에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모두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혼자만의 여가시간을 갖는다. 상점도 빵집만 겨우 열 뿐이다. 


'아...난 평일에는 출근해야 하는데...일생일대의 기회를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가.....'


너무나 아쉬운 마음에 정말 가능한 프로그램이 없는지 샅샅이 찾아보는데

번개처럼 내눈에 띈 프로그램이 있었다. 


-Dessine au musee (미술관에서 그림 그리기), 1830h-2130h


평일 저녁 시간에 미술관에서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 상세 설명을 보니 파리안의 다양한 미술관에서 일반 관람시간 후에 입장해서 강사와 함께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나는 내가 파리에 온 이유가 이 프로그램을 듣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에 까지 이르러

다음날 상사에게 단호하고 강력하고 동시에 간절하고 애절하게 일주일에 한 번만 일찍 퇴근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못하면 평생 후회할 것이다. 내가 파리에서 하고 싶은 건 이거 하나다. 일을 더더욱 열심히 하겠다. 등등등....


그리고 등록일이 되어 포스터가 붙어있던 곳의 등록 장소로 향했다. 

10시부터 등록시작인데 9시 반에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의 마음은 더더욱 설레고 두근두근 해지기 시작했다. 외국인은 찾아볼 수 없었다. 

파리지앵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구나! 이거 좋은 기회인게 확실하구나!


얇고 누런 갱지에 프린터로 출력한 것이 아닌 도장으로 찍은게 분명한 흐릿한 파란 잉크로 

76 이라 적힌 번호표를 들고 대기 장소에서 대기했다. 

어린 아이들, 어린 아이의 부모들, 중고등학생들, 대학생 또는 직장인들이 

빼곡하게 그 장소에서 나와 함께 대기했다. 꽤 오랜 시간 기다렸지만, 파리에서 6개월 산 나는 그 시간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파리에서는 기다리는 것이 국룰, 더구나 이렇게 설레이는 기다림이라니! 


75번부터 80번까지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간 문 뒤에는 큰 작업실이 있었고,

길다란 책상 여러개가 일렬로 놓여있고 한 사람마다 앉아있었다. 

첫번째 책상에서는 신청서를 배부하고 번호표를 수거하고, 두번째 책상에서는 신청서 작성, 세번째 책상에서는 수강비 결제 등의 순서였다. 카드 결제는 되지 않아 현금이나 수표를 사용해야 했는데, 나도 LCL 수표책을 꺼내 금액과 이름을 적고 멋지게 촥! 뜯어서 제출했다. 수표책을 쓰는 건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완전 멋진 LCL 은행 수표책, 수기로 적은 후 북 찢어 제출! (물론 계좌에 있는 금액 안에서만 쓸수 있다 ㅎㅎ)


저녁에 미술관에서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이라, 장소는 매주 달라졌다. 

어디로 가야할지는 강사가 전날 이메일로 알려준다고 했다.  미술관과의 협의가 오래 걸리는 경우도 있어 어떤 날은 당일날에야 메일을 받을 수 있던 날도 있었다. 

한가지 걱정되었던 부분은, 영어로 된 수업은 불가능해 모두 불어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는데,

뭐, 그것때문에 포기하기에는 나에게 너무나 어마어마한 기회였다.

Art will talk by itself!


몇주인가를 기다려, 드디어 모르는 프랑스인으로부터 메일이 왔다. 

내가 등록한 과정을 맡은 강사였고, 첫 수업은 루브르 장식예술 미술관에서 하니 저녁 6시 30분까지 미술관 입구로 모이라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루브르에서의 첫 수업.

꿈은 아니겠지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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